0. 들어가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큰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실험실이라는 공간은 사실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흘러가는 공간이지만, 교수라는 항성 곁에서는 시간이 굉장히 느리게 흘러간다. 이와 같은 현상을 "상대성 교수이론"이라 부르며, 회식자리나 발표 시간, 혹은 자동차나 기차,비행기 같이 밀폐된 공간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다.

FIgure 1. 상대성교수이론의 개념도. 실험실 시간 평면 상, 교수라는 항성이 출현할 경우 관측자의 시점에서 시간은 굉장히 느리게 흘러간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린 교수를 피할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실험실 생활과 인생관리를 위한 두 가지 큰 방법이 존재한다. 아니,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게, 시간관리하는 방법 자체가 두 가지 정도 말고는 사실 별로 없다. 바로, 프랭클린 플래너식의 방법과 Getting Things Done (GTD) 방법이다. 


1. Franklin planner 방식

스티븐 코비가 벤자민 프랭클린의 습관을 기본으로 하여 디자인하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낸 미끼상품인 프랭클린 플래너는 종이로 된 다이어리계에서는 꽤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방식에 대해서 정말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체계적으로 삶의 큰 그림을 설계하고, 그 그림에 따라 수십년간의 계획 > 1년 간의 계획 > 한 달의 계획 > 하루의 계획을 세워나가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흔히 제시하는 그림이 바로 모래와 돌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가지 일들을 중요도와 긴급도에 따라서 네 가지로 분류하자면,

A 중요하고 긴급한 일

B 중요하지만 긴급하지는 않은 일

C 중요하지 않지만 긴급한 일

D 중요하지도 않고 긴급하지도 않은 일

이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긴급도와 중요도에 따라 일의 크기를 큰돌부터 모래까지의 크기로 분류하고, 이를 컵에 담아야 하는 경우를 상정해 보자. 이를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담게 된다면, 컵은 십중팔구 아래 왼쪽 그림과 같이 컵에서 흘러 넘치거나 정작 중요한 것들을 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들 부터 컵에 채우고, 남은 공간에 그보다 덜 중요한 것을,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고 긴급하지도 않은 일들은 과감하게 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한정된 컵을 올바르게 채우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Figure 2 프랭클린-코비 방식의 중요한 것들로 인생이라는 컵을 채우는 방법. 아마 코비박사는 야근하고 온 다음 날, 애들이랑 놀이공원에 데려다 달라는 마누라가 없었나 보다. 이 아저씨 인생이 조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사신 듯. 거 참 인생 너무 만만하게 보시네. 

이 방식에 따른 일은 네가지로 나뉜다고 앞서 기술했다. 각각의 예에 해당하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긴급한 것

긴급하지 않은 것 

 중요한 것 

 A 다급한 문제, 마감에 쫓기는 프로젝트/회의/준비

 B  준비/예방/계획, 가치규명, 인간관계 구축, 여가 (재창조) 

 중요하지 않은 것

 C 불시방문/긴급전화, 일부 e-mail, 일부 회의

 D 하찮은 일, 시간낭비, 일부 전화, 일부 email, 지나친 음주가무 

이러한 각각의 조건에 따라, 일들을 A/B/C/D에 따라 분류하고, 각 분류별로 우선순위를 정해서, 중요하고 긴급한 일부터 찬찬히 처리해 나가라는 것이 바로 프랭클린-코비식 시간관리 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지배가치, 사명을 설정하여 일생의 큰 돌을 세우고, 수십년 > 수년> 올해> 이번달> 이번주> 오늘 하루 순으로 계획을 세워나가라는 식인데, 문제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은 CEO가 아니라는 점이다. 

프랭클린-코비식 시간관리법은 자기 자신의 일정을 자신이 어느 정도 콘트롤할 수 있는 위치와 상황에서 빛을 발휘하는 것이지, 내일 당장 학회를 가려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교수님이 술에 취하셔서 내일 마감인 연구비에 대한 계획서를 오전 중으로 완성해서 책상위에 놓으라는 전화를 받는 대부분의 학위과정학생/비정규계약직연구노동자에게는 큰 효용이 없다. 또한, 계획에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시시각각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는 상황에 대처하기 힘들다는 큰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으로의 GTD (getting things done) 방식의 시간관리가 대두되게 된다. 

2. GTD (Getting Things Done)

말이 좋아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거지, 사실 GTD는 시시각각 새로 추가되는 잡일부터 중요한 업무 하나 하나에 대해서 프랭클린-코비 방식으로 시간관리를 세우느라 정작 업무를 완료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일을 했으면 뭐라도 좀 끝내놓고 집에 가서 자자"는 식으로 만들어진 시간관리 방식이다. 따라서, GTD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할 일을 수집하고 빠르게 분류한 뒤에 금방 끝낼 일들을 먼저 끝내놓는 방식이다. 이러한 GTD를 따른 경우 업무의 흐름은 아래의 모식도와 같이 흘러가게 된다. 

Figure 3 GTD에 따른 일반적인 업무 흐름도. 딱 봐도 정말 하기 싫은 잡일을 처리하는데 적합하다. 

각각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먼저 수집단계에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단 모아놓는 작업이 중요하다. 한참 업무를 하는 도중에 새로운 업무가 출현하게 되는 경우 일단 아무 생각없이 수집을 해놓고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 해놓고 분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류 단계에서는 수집 바구니에 담긴 업무를 한번에 하나씩 꺼내서 분류하고, 일단 꺼내놓은 업무는 다시 집어넣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검토 단계에서는 현재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우선순위가 있는지를 고려해서 검토하고,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실행이다. 

사무실에서 정말 시시각각 추가되는 업무에 치여서 일단 일을 끝내고 보자는 식의 시간관리 방식은 일견 굉장히 효율적으로 보이고, 실제로 상사가 시키는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미덕인 일선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업무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무만 보고 큰 숲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당장 눈 앞에 닥친 업무에 치여서 처리하는 것이 주된 방식이니, 창의적인 작업이나 중요한 프로젝트 전체의 조망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일만 하면서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고 말이다. 

3. 비교 프랭클린-코비 vs GTD, 그리고 연구자에게 가장 적합한 시간관리 방식은?

이 두 방식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프랭클린-코비 방식은 임원급 이상이 자신의 일을 충분히 생각하고 소중한 것 부터 먼저할 수 있는 top-down 방식이라면, GTD는 사원~과장 급에서 닥치는 대로 일단 눈 앞의 일을 처리하는 식의 bottom-up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가치지향점

일처리방식

주된 대상

프랭클린 코비

First things first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Top-down

부장~임원 (박사이상)

GT

Getting thing done

눈앞에 있는 일부터 처리하라

Bottom-up

사원~과장 (석사급)

표1 각 시간관리 방식의 비교

문제는 연구자에게 있어서 업무란 소중한 것과 잡무가 섞여있는 잡탕밥이기 때문에, 어느 한 방식으로 시간을 관리할 수 없다. 또한, 각 개인별 특성에 따라 시간관리 방식의 효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가장 효율적인 시간관리는 이 둘을 적당히 섞어서 일은 일대로 해내고, 소중한 업무는 소중한 업무대로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우리가 실험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일들을 정리해보자.

석/박사 학위논문

논문작성

주된 프로젝트 관련 실험

사이드 프로젝트 관련 실험

의뢰받은 실험 

학생지도/면담

학생실험 지도

학생시험감독

학생성적처리

연구비 보고서작성

연구비 신청을 위한 계획서

세미나 등 초청강연 준비

교무회의

실험실/교실 경조사

실험실/교실 회식

공동연구관련 실험

갑자기 하게 된 실험

교수회의

가족과 시간보내기

운동

친구/동료와 술자리

위키피디아/엔하위키 탐독

mlbpark 불펜 탐독

독서

음악감상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인 부탁

갑자기 생겨난 일

네이버/다음 뉴스 탐독

MdPhD 블로그질

Bric 소리마당 탐독

Hibrain.net 교수의길 탐독

휴가계획

표2 우리가 실험실에서 마주하는 일들. 대게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일들을 프랭클린-코비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긴급한

긴급하지 않은  

 중요한

A

B

/박사 학위논문논문작성주된 프로젝트 관련 실험연구비 보고서작성실험실/교실 경조사실험실/교실 회식, MdPhD 블로그질, 강의준비

사이드 프로젝트 관련 실험학생지도/면담연구비 신청을 위한 계획서세미나 초청강연 준비공동연구관련 실험가족과 시간보내기운동친구/동료와 술자리독서음악감상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인 부탁휴가계획 

중요하지 않은

C

D

의뢰받은 실험학생실험 지도학생시험감독학생성적처리교무회의갑자기 하게 실험교수회의갑자기 생겨난

위키피디아/엔하위키 탐독, mlbpark 불펜 탐독네이버/다음 뉴스 탐독, Bric 소리마당 탐독, Hibrain.net 교수의길 탐독

 

아. 물론 개인마다 중요도와 긴급도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지의 마법사가 무서워서 MdPhD 블로그질이 A항목이지만, 여러분들의 경우는 D로 두어도 사실 큰 문제는 없다. 이러한 중요도와 긴급도는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이를 설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책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여하간, 이런 식으로 자신이 마주하는 일들을 분류하는 작업은 프랭클린-코비식으로 하고, 이중 C항목에 해당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GTD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정말 중요한 일에 몰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될 듯 싶다. 물론, 중간 중간에 새로운 일들이 생길 경우에는 GTD식으로 일단은 한 곳에 모아두고, 시간을 내서 이를 다시 분류하면 된다. 아, 그리고 D항목의 일은 하지 말자. mlbpark 불펜에서 jpg파일을 보는 것이나 엔하위키에서 반지의 제왕 스레드를 탐독하는 것만큼 시간을 왜곡하는 건 없지만, 적어도 근무시간에는 하지 말자.

연구자에게는 실험을 행하는 사람의 역할도 필요하지만, 창조적으로 논문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역할도 중요하다. 또한, 교육자로써의 역할도 중요해서, 학생들의 강의 준비를 하는 작업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교육과정에서 생겨나는 잡무를 처리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따라서, 때로는 프랭클린-코비 방식을 사용해서 숲을 보는 역할도 해야하고, 때로는 GTD를 이용해서 일을 처리하는 나무를 보는 역할도 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다 귀찮다. 난 나만의 방식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정년이 보장된 정교수가 되세요. 

그러면, 적어도 총장실 앞에서 침을 뱉거나, 학생들을 성추행하거나, 연구비를 횡령해서 착복하지 않는 이상은 짤리지는 않을테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꺼다. 물론, 우리 MdPhD 블로그에 들어오는 여러 신사 숙녀 여러분들은 정교수가 되더라도 저런 인간 이하의 짓거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4. 끝맺음

사실 실험실에서 시간관리에 왕도는 없다. 개개인마다 차이도 있고, 시간관리를 잘 한다고 꼭 연구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박봉에다 일이 힘들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실험실에서 밍기적 거리다 보면 새로운 발견을 할 수도 있으며, 실험실 앞을 산책하다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가 노벨상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시간을 쪼개서 여러가지 일들을 하는 것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길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연구비가 필요하지만,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무한경쟁 사회는 연구자들에게 창조적인 생각을 할 시간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잡무를 처리할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씁쓸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 동안 당신의 경쟁자들 역시 치열하게 연구하고 있다. 우리 모두 살아남자. 아니, 잘 살아남자.


Figure 4 2011년 수지상세포를 발견해서 노벨상을 받은 Dr. Ralph M. Steinman. 박사과정 학생이 이상하다고 가져온 세포를 연구실의 구닥다리 광학현미경으로 꼼지락 꼼지락 살펴보다가 손가락 모양으로 뻗은 세포를 관찰한 후,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서 면역학 분야에서 수지상 세포를 발견하는 업적을 이루셨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였다면, 박사과정 학생은 밤새 현미경 들여다보는 교수님 때문에 바늘방석이였을꺼야. "아~씨 퇴근해야 하는데 왜 안 가시지? 여친한테 오늘 못 볼 것 같다고 카톡해야겠다." 하고 말이다.) 그런데 다른 것 보다도, 박사과정 학생이 가져온 세포를 밤 늦게까지 관찰할 수 있는 환경이 부럽다. 우리나라만큼 연구자들을 쥐어 짜내는 나라도 드물기는 할꺼다. 아니, 다른 나라들도 비슷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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