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나 신기술 그리고 질병은 기본적으로 과학이라는 테두리에 있지만,생명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와 항상 연계되어 있습니다.

 

하버드에서 지카 바이러스에 걸린 태아 임신 중절에 대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네요.

 

지카 바이러스는 남미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로, 임산부가 걸린 경우,언제 감염되었는지에 따라서 그 증상은 다를 수 있지만, 태아의 소두증을 유발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임신을 하고 나면 대략 24주가 지나면 Late-term 이라고 해서, 임신 중절을 하는 것이 상당히 조심스러워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출산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윤리적인 문제가 오고 갑니다. 그 중 하나가, 장애를 가진 아이의 출생과 그 출생을 감수해야하는 가족들의 부담 문제입니다.

 

출산과 생명은 신비하고 중요하지만,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산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추가로, 장애를 가진 아이가 평생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다면 가족들 중 누군가는 그 아이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출산 전에 그 장애 사실을 몰랐다면 그 희생이 당연하게 여겨지겠지만, 만약 그 장애를 출산 전에 알았다면.. 그리고 그 태아를 중절 수술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면...

 

이건 아주 중요한 사회-윤리적인 이슈가 됩니다.

 

과연 장애를 가진 아이를 태어나게 해서 생명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이로울지, 아니면, 남은 가족들의 행복권을 추구하는 것이 이로울지는 누구 하나 선뜻 결정내리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설문조사를 통해서 이런 방향성을 가늠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에게 이런 일이 다가온다면, 결코 설문 조사처럼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면 중절 수술의 가능성은 줄어들 것입니다.

 

하버드에서 실시된 설문 조사는 단순하게 보면, 중절 수술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카 바이러스가 태아에게 위해하고, 소두증을 유발하고, 현재 소두증에 대한 치료가 없다"라는 가정에서 시작된 설문조사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갈습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중절 수술에 반대하는 여론 조사가 일주일 전에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슈와 다양한 설문 조사가 곁들여져 있네요. 특히 지카 바이러스가 유행하면, 힐러리가 훨씬 더 잘 다룰 것 갈다고 보는 유권자들이 많네요.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의학이 과학의 근거를 가지고 제대로 서야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단 한순간의 선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고,그 후속 조치들이 그 사람의 평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끔 검증받고,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 바로 의학이고 이런 토대에서 사회 윤리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평생을 연구만 하는 사람 혹은 앞으로 연구만 할 사람이다. 의사이긴 하지만, 임상 진료를 업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건강 보험의 실제 폐해에 대해서는 몸소 겪어본 적이 없다. 특히나 보험 심사를 통해서 진료 청구 후, 청구 금액이 삭감되거나, 환수된 경험은 더군다나 없다. 가끔씩 환자를 보기도 하고, 연구 기간 동안 환자를 보기도 했지만, 개원을 했거나, 개원가에서 일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의사로서 현장에서 뛰고 있는 내 가족들과 내 주변 동기들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는 있다. 현재 나는 한국에 있지 않고, 한동안 한국에 들어갈 예정은 없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연구하는 입장으로 다양한 코웍과 임상 현장을 느끼면서, 여기는 되는데 왜 한국은 안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대표 편집인인 "오지의 마법사"의 조언(?)에 따라, 앞으로, 조금은 한국 의료계에 시사적인 글을 쓰고자 한다. 내 의견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내 의견이 무조건 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칫하면 넘길 수 있는 혹은 현재까지 암묵적으로 넘어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조금은 "꼬집어가면서 의식하는 일"이 의료계에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남기고자 한다.

가족이 연계되어 있고, 나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에, 완벽한 객관성 혹은 중립성을 유지하기 힘들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임상 진료를 하지 않는 기초 연구자로서 혹은 제 3자로서의 시각이 밥그릇 싸움으로 보이는 동료 의사들의 입장보다는 "조금은 더 객관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항상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 시점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형태가 올바르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니, 생산적인 비판이나, 댓글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오늘은 시작하는 글로 노환규 전임 회장의 "의사, 환자 정부 그리고 민간 보험 회사"에 대한 슬라이드와 "과학자의 중립성 그리고 깨어있는 생각"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한국 의료 시스템이라는 곳에서 희생을 하고 있다. 의사도 그러하고, 환자도 그러하다. 일견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내재된 문제는 안 보인다 뿐이지, 항상 존재한다. 마치 통증을 겪기 전에 전이되고 퍼지는 암처럼. 다만, 섣불리 건드리기에는 너무나도 많이 와버렸고, 갑자기 고치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반발이 있고, 더군다나 많은 돈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애써 안 보려고 노력하는 것 뿐이다. 

항상 윤리란 것은 상대적이다.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을 것 같은 윤리에서 "옳고 그르다는 것이 상대적이다" 라는 말은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이 여기 미국에서는 무참히 깨지는 경험을 많이 하면서, 모든 것이 상대적일 수 있다는 가정을 하게 되었고 윤리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물론 대부분의 가치들은 비슷하고, 한국에서 괜찮은 놈들은 미국에서도 괜찮고, 미국에서도 괜찮은 놈들은 한국에서도 괜찮은 놈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나 여러 이해 당사자들(의사, 환자, 정책 입안자(정치인) 그리고 보험 회사)이 걸려있는 의료 시스템에서의 "어떤 것이 더 올바른가"에 대한 윤리는 훨씬 더 복잡하다. 모두들 한꺼번에 만족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래, 전임(!) 의사협회장이신 노환규 선생님의 슬라이드가 있다. 단지 하나의 사례일 뿐이고, 단지 하나의 슬라이드일 뿐이다. 하지만, 충분히 공감하고 있고, 명확하게 문제를 꼬집고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이라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의사들의 밥그릇보다 더 큰 밥그릇을 가진 사람들은 무대 뒤에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존재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그리고 돈을 많이 버는 것처럼 보이는 의사만이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의사도 보지만, 궁극적으로 환자도 보게 된다.

대한민국 의사들 왜 투쟁하는가 from Hwan-Kyu Roh 화살표를 클릭하시면서 넘기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확대해서 보시길 권장합니다. 의사가 아닌 사람이라도 꼭 읽어보면 좋을 듯 합니다.

이 곳이 의과학자 블로그인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면 시사적인 혹은 의료 시스템을 꼬집는 글이 블로그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의과학자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언젠가 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알아야할 정보라 언급했다. 아울러, 연구를 하는 혹은 하고자 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환자가 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과학은 항상 객관적인 근거로 승부하고, 그 자체는 중립적이다. 

하지만, 그 결과를 이용하는 사람은 중립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언제든 내포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는 것이 과학 정책이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라는 이유로, 또는 중립적이고 싶다는 이유로, 그 정책을 만드는 것에 의견내는 것을 외면한다면, 내가 중립적으로 만든 결과로 타인이 미래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너무 정치 편향적인 과학자도 옳지 않지만, 너무 무관심한 과학자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항상 깨어있는 생각. 거창해 보인다. 따지고 보면 항상 깨어있을 필요도 없다. 가끔씩 나를 스쳐가는 사안에, 조금의 생각을 보태는 것. 단, 그 생각에는 고민이 있고, 근거가 있고, 대안이 있어야 한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 쳐봐도, 변하지 않을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할 것은 변한다. 하지만, 내 사소한 생각 하나가, 미래 세대의 변화를 이끄는 촛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2014.5.25 나비 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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