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 1학년.

나의 본과 1학년은 1월부터 시작되었다.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 의대 선배나 의대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골학OT[각주:1], 동아리에서 해주는 골학OT을 들으면서 예과 2학년 겨울방학을 보냈다. 예과 때 여유롭게 지냈던 다른 방학들과는 달리, 겨울 방학은 본과 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무언가 이제는 더이상 놀 수 없겠다라는 복잡 미묘한 심경으로 방학을 보냈던 것 같다. 동기들도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방학 때, 탐구 생활을 살펴보면서 방학 숙제를 하는 것처럼, 골학책(메뉴얼)은 본과를 곧 맞이할 예과 2학년들에게는 "탐구 생활" 책과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은 잠자리나 소금쟁이 대신 다양한 뼈 이름과 신경 다발들이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뿐. 탐구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골학책을 살펴 보면, 진짜 탐구할 것이 많긴 하다.

처음에는 이름도 외우기 힘들었다. 수많은 라틴어들과 정체모를 단어들. 해부학 용어와 짬뽕되어 있으면서도 알듯말듯한 단어들. 영어를 아주 잘하는 아이들에게도 의학 용어새로운 언어일 뿐이었다. 분명 영어로 쓰여져 있지만, 해석이 되지 않는 문장들을 접하면서 의학 용어를 깨달아 갔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골학은 해부학을 필두로 하는 의대 본과과정을 배우기 이전에 잠시 맛보는 시식 음식 같은 느낌이 있다. 다만, 맛보고 나서 맛이 없으면 안 사면 그만인 시식 음식과는 달리, 본과 공부는 꾸역꾸역 집어 넣어야만 했다. 먹고 토할지언정 쏟아지는 정보를 온 몸으로 받아내어야만 했다.



골학은 말그대로 골학이다. 뼈에 대해서 공부하는 과정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뼈들이 어떤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뼈들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그 주변에 어떤 구조물들이 있는지에 대해서 공부하는 과정이다. 골학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긴 하지만, 단순히 뼈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의대에서 쓰는 용어들을 배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학 용어의 틀은 대부분 이 때 완성되었던 것 같다.

아울러, 뼈는 어디까지나 인체의 기둥이 될 뿐. 그 외적인 부분, 예컨대, 뼈 주변에 붙은 근육들, 혈관계, 신경계 그리고 뼈가 담고 있는 내장기관, 뇌 등에 대해서도 간략히 배운다. "간략히" 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전혀 간략하지 않다. 골학을 공부하고 나면, 뼈에 대해서 다양하게 아는 것은 물론이고, 말 그대로 피와 살이 되는 의학 지식을 배운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의대 학점에서 골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아주 적다. 굳이 학점으로 따지면 0.1학점 혹은 0.5학점 내외일 것이고, 해부학에서도 차지하는 위상도 낮다. 하지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골학을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들이 해부학을 "초열심히"하는 현상은 그리 관찰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두쪽나지도 않는다. 골학은 어디까지나 골학이다. 자신이 의학에 처음 발딛는 학문이라고 본다면, 그 것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지 않을까?

참고로, 난 골학때 선배가 가지고 있었던 두개골(skull)과 함께 2주를 살았었다. 지금은 인조 뼈로 공부하는 것 같던데, 당시만 해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사람 뼈를 전통처럼 가지고 있는 동아리나 고교 동문이 있었다. Skull 파트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골학 공부를 한창할 당시의 내 책상위에는 항상 두개골이 있었다. 누구 것인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책상 위에 Skull과 함께 Femur(장단지뼈)가 아주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Skull을 이리 돌리고 저리돌리면서 공부했지만, 내 동생은 항상 무서워 했다. 그리고 내가 없었던 하루, 그 skull 때문에, 동생은 혼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족이 오기 전까지 하루 종일 밖을 배회했다. 미안하다 동생아. 지금에서야 사과한다.

상상해보라. 방 안에는 스탠드만 켜져 있고, 그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두개골 뼈를 들고 유심히 살펴 보고 있다. 책상 위에는 아주 긴 사람의 장단지 뼈가 놓여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스탠드만 켜져있는데, 방문이 아주 살짝 열려있고 당신이 그 걸 목격한다면. 빨리 도망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위와 같은 상황은 스릴러 속에서 범인을 보여줄 때 쓰는 장면 아닌가? "어떤 의대생이 방 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면 당신은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두개골에는 참 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구멍도 많고, 볼록 튀어나온 부분도 많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그런 독특한 구조물 하나 하나마다 이름이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신기한 사실은  그 이름을 무조건 다 외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더욱 더 신기한 사실은 결국은 동기들 대부분이 그 구조물들의 이름을 다 외워서 서로 그 구조물에 대해서 농담을 하면서 논다는 사실이다. 너는 patella bone가 있네 없네, Zygomatic bone이 크네 작네... 하면서. 설마... 하겠지만, 본과 1학년이라면,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뼈를 가지고 보면서 모든 구조물은 나름의 특징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울러 어떤 사소한 구조물도 그냥 생긴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 것이 생겨야할 조건을 수반한다. 예컨대, 뼈에 어렴풋이 발견되는 그루브(골-골짜기)이 있다. 대부분의 뼈에 있는 그루브는 정맥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자발적으로 피를 보낼 수 없는 정맥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뼈에 이런 중요 그루브들이 있다. 골학때는 이 그루브 이름을 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 중에 하나는 그 그루브가 왜 중요한지, 이유 역시 외워야 된다. 그냥 뭐든 말하면 외워야 한다. 외우다 보면 이해가 가더라... 누구는 그루브에 맞추어 리듬감 있게 춤을 추겠지만, 우리는 이 그루브에 맞추어 특정 정맥을 외워야 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구조물에 이유가 있고, 나름의 설명도 있다. 충분히 재미도 있다. 설명을 곁들여 공부하면 아주 즐겁다. 하지만, 당신이 공부해야할 양은 "이해를 하고, 설명도 듣고, 교과서도 읽으면서 하기"에는 너무나도 양이 많다. 15시간을 공부해야만 모든 것을 한번 읽고 이해할 수 있는데,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10시간밖에 없고, 그 시간안에 무조건 외워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의대 공부의 한계점이라면 한계랄까. 나도 글 읽을 줄 알고, 이해할 줄 알고, 설명을 곁들이면서 공부할 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모자라다.

의대, 병원... 모든 일들이 이런 식으로 벌어진다. 하루 24시간 동안 30시간 분량의 일을 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의대에서는 자연적으로 우선순위를 매겨서 학습할 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족보만 보고 공부하기에도 빡빡하다. 물론 "이런 것이 효율적이냐" 라고 한다면, 분명히 이론이 난무하고, 난상 토론이 될 것이다.  

그렇게 골학과 해부학이 지나가면, 벌써 봄이 끝나버린다. 남들은 벚꽃놀이도 가고, 봄의 따뜻한 온기를 즐기지만, 해부학 책만 파고 있는 의대생들에게는 봄이 없는 듯하다. 아니다. 가끔씩 이 힘든 상황에서 봄을 즐기고자 하는 외계인 무리인 "캠퍼스 커플"[각주:2]이 탄생하기도 한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이 피어나는데 하물며 해부학 수업쯤이야.

  1. '골학'은 해부학의 입문과정으로, 뼈(골,bone)의 구조물에 대해서 공부하는 과목이다. 선배들로부터 이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강의를 받곤 한다. [본문으로]
  2. 엄밀히 말하면 캠퍼스 커플(CC:Campus couple)이라기보다는 클래스 커플(Class couple)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본문으로]

  졸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과생활을 되짚어보는 일은 나에게는 정말 힘들었다. 특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했던 1학년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입학하기 전 나는 의학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떠한 것을 공부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겠다 싶다.) 사돈의 팔촌을 뒤져도 의사나 의료계 근처에서라도 일하는 사람도 없었고, 게다가 나는 문과계열 출신이다 보니 건너건너 아는 친구도 없었다

닥터몽 의대가다

(닥터 몽 의대 가다 프로그램 정도 수준만 되어도 본과 1학년 10번은 하겠다.출처 : (C) CJ E&M  All rights reserved.)


  몇 년 전 케이블 TV에서 지금은 튼튼한 임플란트를 장착하고 두문불출하고 있는 MC몽이 의대생 생활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다. (실제 내가 경험해보니 그것은 실제 체험강도의 한 1/10 정도 되는 듯하다.) 내가 아는 의학도들의 생활은 TV에서 보는 그런 것들이 전부였고, 일반 대학생보다 조금 많이 힘들고 많이 공부해야 하는 학생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한 것 그 이상이 아닌 상상도 못한 생활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얼른 대학생이 되어서 자유를 만끽하고 살아야지

고등학교 때 수능시험과 내신의 압박을 받으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실제로 대학은 중고생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곳일 수 있다. 우선 성인이 되어 많은 제약이 없어지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업의 압박,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의 압박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시간표도 내 마음대로 짜고, 수업시간도 많지도 않고, 오후 늦게까지 수업들을 일도 별로 없고, 야간 자율학습도 없고, 학교가 끝나면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방학도 길고, 배우고 싶은 다른 것들도 배우고이런 것을 상상했다면 실제의 대학생활에서도 가능하다. 물론 학문에 뜻이 있는 자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하루 20시간을 보낼 것이고, 최근 취업 문이 좁아져서 많은 청춘들이 취업준비를 위해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대학생활의 본질은 자율성에 있다

그러나 당신이 진학한 곳이 의과대학이라면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난다. 의대 본과생활은 당신이 성인이 되었다는 것과 교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3생활과 다를 것이 없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외워야 할 것, 공부할 것은 더 많아지고, 더 어려워진다. 더불어서 방학도 훨씬 짧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의대 본과 1학년을 상상한다면, 실제 생활은 어떤 것을 상상하든, 상상하는 것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서론은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본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본과 수업은 정해진 학습목표에 근거하여 공통적인 과목들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커리큘럼은 학교마다 다르므로 필자가 다닌 학교만을 기준으로 서술하겠다.


"수강신청 전쟁"은 어느 별 이야기?

의대가 아닌 대학교 학부강의와 가장 큰 차이점은 첫째, 내가 시간표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수업 구성에 있어서 자율성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다!!!!!

보통 학부 수업은 졸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학기 수와(보통 8학기), 학점 수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시간표를 구성한다.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들은 정해져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흥미 있는 과목 위주로 구성할 수도 있고, 관심도에 따라 특정 계열 수업은 더 듣거나 덜 들을 수도 있으며, 다른 과의 수업을 듣는 것이 가능하다. 나아가서 복수전공부전공도 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시간표도 짜기 나름이라 3파 주4 하는 식으로 수업이 없는 날을 만들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옵션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학생들이 선호하는 인기강의, 인기교수, 인기강사들도 등장하고 수강신청 전쟁이라는 것이 매 학기 연례행사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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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2013년 SNS에서 인기를 끌었던 수강신청 전쟁 동영상 한장면, 의대생에게는 별나라 이야기이다.>

그러나 의과대학의 본과수업은 이런 면에서의 자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등학교처럼 시간표는 이미 정해져 있고 실습장비가 필요한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 학생들은 그저 강의실에 앉아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시간마다 교수님이 바뀌어서 들어오신다. 말이 강의실이지 교실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개설되는 모든 과목이 전공필수이므로 학생들은 좋든 싫든 모든 과목을 들어야 한다. 강의선택이 불가능하니, 인기강의와 비인기강의도 원칙상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강신청 변경기간이나 수강신청 취소기간 같은 것도 없다 (학교에 따라서 간혹 임상실습 과목 중 일부를 선택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다. ) 완전 중고등학교네?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중고등학교는 그래도 1년마다 반이 바뀌어서 새로운 얼굴들과 수업을 듣고 함께 어울리지만, 본과생활은 졸업할 때까지 반도 안 바뀌고 같은 얼굴들과 계속 수업을 들어야만 한다! 그것도 4년 이상! (신중히 CC[각주:1]를 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매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전공 필수과목이나 인기과목들을 신청하기 위해 캠퍼스마다 벌어지는 수강신청 전쟁 같은 것은 의대에 존재하지 않는다각종 노하우와 심지어는 암거래도 오간다는 설이 들리는 수강신청 전쟁, 그것은 어느 별 이야기인가요?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 재수강? No, 유급

정해진 시간표라는 점 때문에 또 한가지 차이점이 발생하는데 과목 재수강과 유급에 관한 것이다. 의대가 아닌 학부에서는 F가 나온 과목이나, 혹은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과목이 있으면 다음 학년에서 시간표를 조정해서 그 과목만 재수강을 할 수 있다. 아니면 듣다가 영 아닌 과목은 수강 포기 기간에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고, 필요한 경우 계절학기를 통해 학점을 보충할 수도 있다. 즉, 몇 개의 과목에서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지 못하거나 F를 받았다고 해도 8학기 내에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반대의 경우도 생기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학점을 일찍 채운 경우 7학기, 빠르게는 6학기만에 학부과정을 마치는 조기졸업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대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불가능하다. 학부에서 졸업학기의 변동 없이 재수강과 학점 올리기가 가능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시간표를 학생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4년 8학기 동안 내가 신청할 수 있는 학점이 졸업에 필요한 학점보다 많으므로, 몇 개의 과목을 다시 들어서 일부 학점을 포기해도 필수 학점을 채울 수 있으며, 어느 학년에 무슨 과목을 들어야 한다고 강제하는 것이 일반 대학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대에서는 필요한 필수 학점으로만 수업 시간표가 짜여 있다. (참고로 이것만 하기도 버겁다.) 따라서, 시간표를 한 번 놓쳐버리면, 다시 수업을 들을 기회는 이론적으로 다음해나 가능한데 학년을 진급하면, 그 수업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재수강과는 다른 유급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다.

출처 : 엔하위키미러 유급 관련 정의 클릭! 

잘 안 와닿는다면, 고등학교를 생각해보자.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고등학교는 시간표를 학생이 정할 수 없다. 내가 2학년 때 수학 과목의 점수를 60점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내 성적은 종료 된 것이지, 3학년에 올라가서 3학년 수업을 모두 들으면서, 동시간에 진행되는 2학년 수학 수업을 다시 들을 수는 없다. 정 듣고 싶다면 2학년 수학과목 시간에 2학년 교실을 가서 강의를 듣고, 그 시간에 진행되는 3학년 한 과목을 포기해야 한다. 여기서 고등학교라는 단어를 의대 본과로 바꾸면 정답이다. 한마디로 제 때 학교를 다니면서 재수강은 불가능하다. 고등학교처럼 1학년 때만 들어야 하는 과목, 2학년 때만 들어야 하는 과목이 정해져 있고, 시간표는 5 빠짐없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받은 성적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때 잘해야 한다. 한 번 흘러간 성적은 다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의대 성적표의 특징이기도 하다. 

유급은 다음 학년으로 제 때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의대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 있으신 분들을 링크한 엔하위키에서 '유급'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출석미달로 같은 학년을 다음 해에 또 다니는 학생들을 속된 말로 

‘1년 꿇었다’ 

라고 표현했는데 비슷한 개념이다. 대신 의과대학에서는 출석미달뿐만 아니라 성적미달로 다음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유급이 된다. 내가 다닌 학교의 경우는 해당학기 성적이 평점 4.5만점에 2,0 미만(평락)이거나 한과목이라도 F(과락)를 받은 학생이 유급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그대가 1학년 1학기에 한 과목을 F를 받고, 나머지 과목들을 모두 A를 받았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리 다른 과목들을 잘했어도, F를 받은 그 한 과목 때문에 2학년에 진급하지 못한다. 같이 입학한 동기들이 2학년으로 올라갈 때 그대는 다시 1학년이 되어야만 하고, 결과적으로 학교를 1년 더 다녀야만 한다. (물론 등록금도 다시 내야겠지.)  만일, 그대가 의대 본과생이 아닌 다른 학부생 이었다면 다음해에 2학년에 올라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고 4학년 되기 전까지 아무 학기에나 그 F받은 과목을 다시 재수강하면 될 텐데 말이다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학교생활은 무관심하고 음주가무에 빠지거나 정말 공부를 못하는 사람만이 유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적이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같이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줄서기처럼 1등부터 꼴찌까지 매겨질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학교마다 매해 유급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이 있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정해진 기준을 그 학기에만 채우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본과 1학년 때 우리 동기들 중에서 10% 2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유급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 모두 대부분의 과목을 B이상의 성적을 받았는데 특정 한 과목만 F를 받아서였다. 그들 모두 결석 없이 매일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리고 해당과목은 늘 10%이상 학생들에게 F를 할당하는 과목이었다. 성적표가 나오자 학년 전체가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그 학생들이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노라고 제발 D-라도 달라고 사정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생은 길기 때문에 1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막상 재학중인 학생들에게는 비싼 등록금을 더 내야 하는 문제 등과 맞물려서 큰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유급 문제이다 

이게 의대생들이 시험에 쪼여가며 빡시게 공부하는 본질적인 이유다. 한 과목이라도 GG치면 1년을 다시해야한다는 부담감

 

별나라에서 사는 본과생들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오는 외계인인 도민준(김수현)도 본과 1학년을 유급 걱정하면서 덜덜 떨면서 공부하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의과대학이 다른 과들과 함께 종합대학의 일부로 소속되어 있지만, 이렇게 특징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합동아리 활동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다른 과들과 활발하게 접촉하기도 힘들고, 여러분야의 학문과 활동을 접할 기회도 적다.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배타적인 캠퍼스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현재 문제가 되는 의사라는 집단과 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을 가져오는 하나의 요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본과 1학년을 되짚어 본다는 것이 너무 장황한 이야기로 진행됐다. 그저 하고싶은 말은 본과생활은 기본적인 대학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 때문에, 학업 자체뿐만 아니라 외적인 것들까지 여러 가지 힘든 기억이 많은 시절이었다. 보통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그때로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다시 말하지만 본과 1학년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단호하게 

“No, thank you.”

되시겠다

  만일 그대의 친구가 현재 의과대학이나 의전원 본과에 재학중이라면? 술 한잔 마시자고 부르는데 안 나온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말자. 그 친구도 나오고 싶어서, 온몸이 들썩거리지만 두꺼운 책과 강의자료에 파묻혀서 다음학년에 무사진급하기 위해 속을 태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의대는 개설된 강의를 모두 들어야 하는 관계로 다른 학부보다 학기는 길고 방학은 짧다. 평균 한달이나 될까?  그나마 그 방학동안 동아리며 봉사활동이며 학과 생활로 치인다. 대학생들의 방학기간에 그 친구는 방학이 아닐 수도 있다!

 

P.S. 

의과대학 본과의 학제 시스템에 대해 예상보다 길게 설명했는데, 그 이유는 얼마 전 이 MDPHD.kr 블로그의 방명록에서 누군가가 의대 진학 후 생물학을 복수전공을 하려고 한다는 글을 봤기 때문이다. 의대의 학제를 일반적인 다른 학부의 학제와 같다고 알고 있었다면 그러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의과대학은 독립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타과 수업을 가서 듣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복수전공까지 하기 위해 다른 학과의 강의를 다량으로 이수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각주:2]


  1. CC는 일반적으로 Campus Couple을 뜻하나, 의대에서는 엄밀한 의미로Class Couple을 의미한다고 보는게 정확하다. [본문으로]
  2. 영국에는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의대 과정 중에 다른 과목을 부전공하는... 여기 필진 중 한명인 EveningTea가 있는 영국 Wellcome Trust sanger 연구소에서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수학을 부전공한 교수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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