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결핵 우범(?) 지역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결핵은 특정 상황, 예컨대 HIV infection으로 인한 AIDS에서 HIV를 발견하는 하나의 증상으로 예시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HIV 없이도 결핵에 걸릴 수가 있죠. 따라서, 결핵은 우리나라 보건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결핵과 전문의도 우리나라에는 존재해요. 

Cell에서 결핵에 관한, 아주 자세한 Review article을 제시했습니다. 최신 pathogenesis 경향이라고나 할까요. 결핵에 대해서 자세히 써놓은 논문이면서도 "꽁짜"로 풀려 있으니깐, 많이 많이 읽으세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교수’ 라는 타이틀에 마음이 가있는 경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법한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오늘의 주제는 ‘영어’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영어는 의과대학 입시, 본과 진입, 대학원 석박사 졸업 등 몇가지 단계를 제외하곤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영어로 된 원서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 등을 포함하여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 수준의 영어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그러나 ‘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싶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아무리 잘 가르치고, 아무리 연구능력이 뛰어나고, 아무리 진료실적이 우수해도 ‘논문’이라는 장벽을 넘을 수 없으면 시작할 수 없고, 설령 시작하더라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교수라는 타이틀입니다.

 

근래 외국에서 살다온 경험을 가진 의대생들도 많고, 영어공부에 대한 강조가 계속 되어 와서 지금의 의대생들 영어실력은 제가 의과대학 입학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합니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영작문에 대한 부담감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수려한 문장을 자랑하는 우리말 한문단을 번역했는데 영어로 두세줄 되는 경험.. 다들 있지 않으신가요? ^^


서론이 길었네요. 오늘 제가 올리는 글의 주제는 한국사람이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할 때 '영어'는 그 본문(논문)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비중(기여)을 차지하는 걸까요?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해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중엔 이른바 논문 영어 교정 이라는 서비스를 이용해 보신 분이 계실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어 교정에 대해서는

 

1) 단과대학 혹은 대학차원에서 지원하는 경우
2) 저널(특히 국내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의 경우) 편집국에서 지원하는 경우
3) 개인적으로 투고 전후에 (영문법에 대한 리비전도 있음) 사설 영문교정 업체를 이용하는 경우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안그래도 논문 저자에 대한 기여도 문제가 뜬금없이 정계 진출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슈가 되곤 하는데..
1) 만약 어떤 사람이 1인이 순전히 이 논문의 영어화 에만 기여했다면 저자가 될 수 있을까요?
대개 논문의 팀으로 만들어지게 되는데 다섯 명이서 논문을 썼다고 가정해보죠. 그런데 이중 한명은 논문을 영어로 쓰는 작업에 100% 기여하고 다른 기여는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이사람은 논문의 저자인가요 아닌가요?

 

1) 번의 경우에서 이 사람을 논문 저자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다음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다섯 명이 실험결과는 멋지게 나왔는데 영어가 서툰 다섯 사람입니다. 이들이 대충 영문으로 논문을 작성하고 사설 영문 교정업체에 교정을 맡겼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어가 틀린곳이 많아서 대폭 수정된 결과를 받았고, 이를 다 반영하여 투고했다고 해보죠. 2) 이런 경우 사설 영문 교정업체에서 이 논문을 수정해준 사람은 이 논문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2) 번의 경우가 헤깔리는 경우 좀 더 세분해서 생각해 봅시다.
3-1) 영어가 너무 서투른 나머지 우리말 논문을 쓰고 이의 번역 자체를 업체에 맡긴 경우
3-2) 서투르나마 아무튼 저자 5인의 손으로 영어 논문을 쓰고 업체에서 대폭 (50% 이상의 문장을 수정?) 뜯어 고친 경우
3-3) 영어 논문을 써서 교정을 맡겼는데 소폭 (10% 미만?) 교정의 결과가 와서 반영한 경우
위의 세가지로 대충 간략히 나눠봤는데 이런 경우는 교정업체의 교정자가 논문에 대한 기여도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3-1)의 경우는 이런경우를 생각해보죠. 국제 학술지에 투고하는데 1인 투고를 가정하고, 이사람이 논문의 내용은 다 만들었는데 영문은 전문 번역업체에 맡겨서 투고했다면 이를 1인 논문이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영문으로 번역한 사람에게 저자로서의 기여를 인정해서 2인 저자 논문으로 해야 연구윤리에 위배되지 않는건지..


여기까지는 사설 번역업체 이야기만 한건데요. 논문을 투고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메이저 리비전, 마이너 리비전이 오는 경우 지적사항 중에 영어가 부실하다 손좀 봐라 라는 지적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영어가 부실하면 대개의 경우 내용 읽지도 않고 리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내용이 아주 성실하고 괜찮은데 읽기가 힘든 수준의 영어다 그러면 아주 착한 리뷰어가 문장 하나 하나 고쳐가면서 메이저 리비전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가 부실한데 마이너 리비전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더군요.).

 

논문 투고 했는데 메이저 리비전이 왔고, 메이저 리비전으로 선정된 주 이유가 영문법에 대한 사유로 정말 친절한 리뷰어가 거의 논문을 뜯어 고치다시피, 원래 투고한 사람의 문장이 거의 안남게 빨간펜 교정을 해주는 경우도 드물게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내용은 원저자의 것이지만 글은 리뷰어의 수정사항을 거의 반영하게 되지요. 거의 리뷰어가 써준거나 다름 없는 경우라고 봐도...

 

자, 3번과 마찬가지 상황을 여기서도 적용해보죠. 리뷰어가 아주 조금 손봐준 경우부터 리뷰어가 한 50% 정도의 문장에 손을 댄 경우까지 가정했을 때 이 리뷰어는 저자입니까?


이렇게 놓고 생각해보니 왠지 영어 문장을 손봐준 교정업체, 리뷰어 혹은 한글 논문을 번역해서 영문으로 만들어준 번역가 는 논문의 ‘저자’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논문의 저자 목록에 있는 사람 중에 순전히 논문의 영어화에만 기여한 사람은 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영어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말 논문을 완성한 후 번역업체에 맡겨서 영어 논문을 만들어 투고한 사람들은 영어 논문의 저자인가요 아닌가요? 저자들의 논문이 되려면 팀 안에 누군가가 영어 초안이라고 내 놓아야 인정될까요? 아니면 우리말로 된 논문 초고가 있으면 저자들의 논문일까요? 또한 번역자의 기여는?


언젠가 일본에서는 영어를 거의 모르는 과학자를 위해 논문 투고를 전문으로 도와주는 시스템 (일문 - 영문의 번역 및 교정)이 있다고 들은것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모국어로 논문을 쓰라고 하면 쓸 수 있는 많은 좋은 표현들이 영문 투고를 위해 날아가는 경험을 다수 해보다가 뜬금없이 생각나서..


마지막으로 영어 한마디 못하지만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본의 과학자 이야기를 링크 걸어봅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472562.html

 

영어 한마디 못하지만 그는 노벨상을 받았다

2008년 물리학상 공동수상자인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 카이스트 100% 영어수업에 빗대 트위터 등에서 다시 화제 수상식 참가 전까진 여권도 만든 적 없어…소감도 일어로

www.hani.co.kr

 

200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교토산업대)는 영어 논문의 작성은 공저자인 다른사람에게, 불가피하게 본인이 작성한 경우는 알파벳이 틀릴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노벨상 수상시까지 여권을 가져본적도 없고, 노벨상 수상식에서 처음으로 일본어로 연설했다고 하네요.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들.

 

1)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논문의 주된 아이디어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영어로 논문을 쓰는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겠지요. 이쪽 바닥에서 공용어로 쓰이는 것이 영어이다보니, 당연히도 다른 연구자들에게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논문을 쓸 수 밖에는 없을테이고, 그래서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국가의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영어논문작성이 큰 산으로 다가오는 것일텐데, 이를 위해서 많은 사설 영문교정업체들이 생겨났고, 많은 도움들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교정을 해주었다고 해서 저자에 넣느냐는 너무 오소독스한 이야기인것 같아요. 사설 교정업체에게는 영문교정을 해준 댓가를 이미 지불한거기 때문에 논외로 해야할 듯 싶습니다. 이외 단순히 영작을 해줬다고 저자목록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반대합니다만, 이건 교신저자의 마음이겠죠. 정말 저자 중 영문작성을 담당한 사람의 표현을 통해서 연구결과를 보다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줬다면야 교신저자의 재량에 따라 저자에 넣을 수도 있고, acknowledgement에 감사인사를 할 수도 있는거고. 만일 리뷰어가 논문첨삭을 해줬다면야 백번 감사할 일이지만, 현재의 peer-review 시스템상 저자로 참여할 수는 없는 상황 아닌가요?이런 경우에는 감사의 편지와 함께 떡이라도 한상자 택배로 보내면 될 듯 싶기는 합니다만.

 

2)

추가로, 논문 저자의 핵심은, 논문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발견의 "지적 기여"입니다. 영어가 분명 지적 기여로 간주될 수는 있지만, "새로운 발견"을 하는데 이용된 것은 아니지요. 분명히 실험을 하고, 그 실험을 분석하고, 그림을 만들어 내고, 글을 쓴 사람에게 저자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애매한 것 하나가, 언급하신 예시의 리뷰어처럼 영어로 "비판적"인 지적 기여가 들어가서, 새로운 발견의 가치가 올라간 상황입니다. 이 부분은 교신저자의 철학과 개인적인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3)
쓰다보면, 사람들이 특히 학생들이 "영어"로 논문을 잘 못 쓰겠다고 하는데, 실제로 논리력 부분에서 허점이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어에 부담을 느낀다고 착각하지만, 실제 논문의 뼈대나 문장력은 "영어" 글쓰기와는 별개로 학습되어야 하는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

사실 우리나라가 유난히 공저자 기준이 관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따지고 보면, "영어" 하나로는 공저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결국 저자의 결정은 교신저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현재 저자에 대한 관대함 때문에 생겨난 일이지, 결코 일반적인 일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한국에서도 한글로 글을 작성하고, 전문 번역업체에 맡겨서 논문을 쓸 수 있는 날이 와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개인이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은 전적으로 "선택"에 맡겨야 하겠지만...

 

5)

영어는 당연히 아무런 비중이 없죠. 의사전달의 툴에 불과하고 논문의 영어 문장을 작성한 것은 서비스의 일종이지 논문의 아이디어나 실행이 아니기 때문에.

 

6)

10000% 공감합니다. 자신의 모국어로 논리적인 사유를 할 수 있고 논리정연한 깔끔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곧 영어(외국어)로도 작문을 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7)

 Acknowledgment 섹션이 그래서 편리한 것 같아요. 저자로 넣기 애매한 사람들 이름 우르르 다 밀어넣을 수가 있으니..

 

에이.. 설마....

오늘은 혈액형에 근거해서 판단한 성격의 허구성을 의학에서 이용되는 더블 블라인드 테스트(이중 맹검 검사)와 논문 출판 프로세스로 논하고자 한다. 항상 다 쓰고 깨닫는 것이지만, 페북에서 읽기에는 글이 항상 길다. 나를 아주 사랑해주는 와이프도 가끔 읽다가 지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길다 싶으면, 그냥 "좋아요" 누르고 넘어가길 추천한다.(뭥미???) 그럼 누군가는 본다. (????)

 

뭐 혈액형 말고도,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경우는 많다. 예컨대,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서울 사람 등등 지역이나 출신에 근거한 성향들. 그리고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미국 등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의 성격 등.. 그리고 남, 녀의 차이 등등..

 

세상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기억 속에 쓰여진 "편견"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존재한다. 이 괴물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가끔은 자신의 결정을 뒤엎기도 하고, 때로는 말도 안되는 결정을 이르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카더라 혹은 일부 예가 확대 편향되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다.

 

중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을 다니던 시절, 싸이월드에서는 유난히 혈액형에 근거한 성격론이 난무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게도 이를 토대로 영화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어딜가나 B형 남자는 공격을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떠들고 다니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워 보였다. 그리고, 생명과학과 의학이 최첨단을 달리는 현시점에도, 여전히 이런 것들이 심심찮게 페이스북에 보이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혈액형에 근거한 성격 평가는 개소리라고.

 

그리고 이런 혈액형 뿐만 아니라, 많은 카더라 식의 근거없는 주관성 역시 개소리라고 하겠다. 근거는 이러하다.

의학에는 다른 학문과는 다르게 치료법을 철처히 검증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바로 더블 블라인드 테스트(double blind test)라는 것이다. 이중 맹검 시험이라고도 한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약 준 사람, 먹는 사람 둘다, 진짜 약인지 가짜 약인지 모르고 테스트하는 상황을 말한다.

 

어떤 약이 만들어 졌을 때, 그 약이 특정 질병에 진짜 효능이 있는지를 확인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의사가 아주 많은 수의 환자 군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테스트한다. 약을 준 그룹과 가짜 약을 준 그룹.

 

단순히 이 약을 주니깐, 잘 낫더라가 아니라, 이 약을 준 사람들과 이 약을 안 준 사람들을 비교해 보니깐, "안 준 사람보다 준 사람들이 훨씬 더 병이 빨리 낫더라"라는 결론은 만드는 것이다. 이 이유는 가끔씩, 가짜 약을 줘도, 심리적으로 반응을 하는 환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니 체했다고 손을 따기도 하지... 에구구.. )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니깐, 의사의 편견이 들어갈 수가 있다. 예컨대, 의사가 이 약은 진짜 약, 이 약은 가짜 약이라고 알고 있는 상태에서 환자에게 약을 주면, 의사 역시 "진짜 약을 준 그룹이 더 효과가 좋을 거야" 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환자의 경과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도 생긴다.

 

그래서, 이 부분 역시 차단하기 위해서, 의사에게도 진짜 약인지 가짜 약인지 알려주지 않고, 똑같은 형태로 약을 준다. 그러면, 의사는 약을 줄 때, 이 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약을 진짜 혹은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의사의 편견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지게 된다.(물론 이를 역추적하는 컨트롤 타워가 있다.)

 

이 두 가지 상황, 즉, 환자가 진짜 약을 먹는지를 의사도 모르고, 환자도 모르는 시스템을 더블 블라인드 테스트라고 한다. 물론, 이 시스템에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편견을 막을 수 있는 현존하는 시스템에서 가장 완벽한 시스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떤 치료법이 효과가 있고,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 짓는다는 결론은 얻으려면 최소한 이런 "테스트"는 해야지 믿을만 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 혈액형 근거를 실험으로 수행한다는 예로 들어 보자. (사실 이런 연구는 말도 안된다. 성격을 판단한다는 그 변수가 너무나도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이라는 이름하에 이 말도 안되는 연구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한 개인이나 연구자가, 충분한 수(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적어도 1000명 이상은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4그룹으로 나눈다. A,B,AB,O 형 네 그룹으로 250명을 할당한다. 개인적으로는 RH+/-까지 변수로 넣어서, 총 여덟 그룹으로 나누고 싶지만,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접자(?). 이렇게 각 그룹에 250명을 할당한 후에, 이 할당된 사람의 혈액형 정보를 지운다. (물론, 나중에 다시금 연구자가 분석하기 위해서 이 지운 원본 데이터는 보존한다. 이거 까지 날리면, 다시 찾아볼 수가 없으니 연구 자체가 삽질이 된다)

 

그리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성격을 객관화시킨다. 이 부분이 사실상 제일 어렵다. 성격이라는 factor 자체가 multiple factors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단순히 하나의 객관화 시킬 수 있는 종속 변수로 귀결되면, 훨씬 더 쉽겠지만, 그렇게 되면 통계적 유의성이 없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여하튼, 성격을 최대한 객관화시켰다고 우기자.

 

그리고 나서, 주변인들을 설문 조사해서, 성격을 최대한 조사 한다고 해보자. 이 부분 역시도 문제가 있다. 주변인들이 그 사람을 느끼는 정도가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 사람의 성격을 엄마의 경우라면, "우리 애가 까칠하긴 해도 성격이 참 좋아요"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크고, 그 사람과 원수인 사람은 "그 새끼 개객끼" 라며,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학술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주변 탐구해서 결론 내놓은 한 사람의 성격 자체의 통계적 유의성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이다. 즉,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 성격인지 "객관화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성격이라고 인정받는 이상적인 인간이 있다고 치자. 어찌 되었든, 그런 인간들을 1000명 모았다고 치고, 그 성격에 대한 분포도를 그리고, 어떤 특정 "성격"의 분포 그룹을 만들어 보자.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이 때, 연구자는 혈액형 분포를 모른다. 이 때 연구자가 분포도를 들여다 보고 성격 분포도를 만드는 순간 편견이 간섭한 것이다.

 

그 이후에 할 일은, 그 분포 그룹이 특정 혈액형 집단과 연계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까칠한 성격을 가진 그룹에서 A형 모두가 완벽하게 소속되었다든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다른 그룹과 구별될 정도로 다수가 소속되어 있다든지.. 등등

 

사실, 이 연구에서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해서 사용되는 통계학적 도구들이 결국 그 학자의 질적 수준을 평가하고, 궁극적으로 연구의 질적 수준으로 귀결된다. 그냥 대충, 오~ 비슷하던데... 오~ 상관 관계가 있는데... 이런 수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우겨서, 그렇게 연구를 해서 특정 연관 관계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논문에 서브미션 했다고 쳐보자. 수준이 높은 저널일 수록, 이런 연구가 과연 근거가 있는 연구이며, 연구 결과가 가치있고, 의미있는 학문적 발전을 이루어 놓은가에 대해서 집요하게 따져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저런 연구를 해서, 수준 높은(이 역시도 아주 주관적이지만,) 논문에 던지면, 당연히 이 연구는 흥미는 있으나, "우리 저널이랑은 안 맞아요" 라는 점잖은(이라고 쓰고 변명이라고 읽는다) 거절 의사가 온다. 왜냐하면, 혈액형과 성격이 연관성이 있을 수 있을만한 기존 연구가 없으며, 상식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근거 없는 연구를 시작해서, 전혀 엉뚱한 포인트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임상적 의의나 활용도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대부분의 논문에서는 거절 의사를 밝힐 것이다. 아무리 창의적인(?) 연구라고 해도, 연구 시작 전에 수준 높은 지적 근거가 있어야지, 그런 것이 없으면, 전혀 황당무개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선풍기 바람에 사망한 어처구니 없는 주장처럼.

 

여하튼, 또 어떻게든 우겨서 논문에 잘 제출했다고 치자. 이까지 올때, 꽤나 과학적이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오 더블 블라인드. 제대로된 4그룹. 연구 좀 되겠는데.. 하면서,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논문을 제출한 이후에는, 그 분야 전문가들이 리뷰를 하게 된다. 만약 내가 리뷰를 하게 된다면, 저 혈액형 그룹이라는 변인에서, 제대로 그룹을 나누었는지를 먼저 확인할 것 같다.

 

즉, 모든 조건이 동일하게, 예컨대, 나이, 성별, 체중 등 기본적인 사항과, 성격을 형성할 수 있는 가족 사항, 학문적 배경, 사회적 배경, 수입 등등 한 사람의 성격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이 저 혈액형 A,B,AB,O 네 가지 그룹에 동일하게 통제되었는지를 제일 처음에 물을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성격이라는 주관적 요소를 최대한 잘 객관화 하였는지, 편견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지 등에 대해서 물어볼 것 같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그렇게 그룹을 나누고 분석을 한 결과가 통계적으로 잘 수행되었는지를 물어볼 것 같다.

 

딱 보면 알겠지만, 처음 물어본 그룹이 잘못되어 있으면, 두번째, 세번째는 거의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 연구는 처음 순간 제대로 계획하지 않으면, 모든 과정이 삽질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가 처음 상황에서 "한번 해보자"라는 보스의 어처구니 없는(?) 아이디어로 시작하고... 하다보니깐 어 안되네... 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다가 결론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저 변인 통제 부분이 사실상 아주 어려운 부분인데, 연구자에 따라서, 이것 저것 우기고,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을 같다고 가정하고,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임에도, 줄 수 없는 것처럼 가정하는 행위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된 리뷰어라면, 이런 부분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Harsh한 리뷰가 오게 된다. 어... 리뷰어의 의견대로라면, 연구를 아예 새로 해야할 것 같은데... 라는 리뷰를 받았다면, 바로 이런 부분에서 자신이 간과한 것들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결국은 리젝션을 먹게 된다. 물론, 모든 리젝셕인 이런 것은 아니다. 출판사 페이지 한계도 있고, 정치적인 이유도 있고.. 다양하다. 단, 지금 혈액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괜히 자신의 이야기로 감정 이입하거나 몰입하지 마세요. 

 

그렇게 리젝션을 몇 번 먹다 보면, 그저 그런 논문에 실리게 된다. 그리고 신문사에는 대문짝만하게, "국내 연구진 세계 최초로 혈액형과 성격의 연계성 보고, A,B,AB,O형 모두 다 까칠할 수 있다(???뭥미???)"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르니깐, 저 신문 기사만 보고, 아 내가 알던 그 까칠한 놈이 A형이였지. 역시 그 녀석은 혈액형대로 까칠했어.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하면서 맞장구를 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혈액형과 성격의 연계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논문은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나온다고 해도, 그 퀄리티는 낮을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는 신빙성 없는 연구일 것이다. 물론, 아주 수준 높은 연구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논문의 결론은 "통계적으로 의미 없음"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까지는 그런 논문이 나오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혈액형에 관해서 누가 "성격을 보면, 너는 혈액형이 B형일 것 같아." "넌 의외로 꼼꼼한데, 혈액형은 또 의외로 O형이네" 라는 드립을 날려준다면, 이렇게 대답해 주자.

 

"현존하는 실험 결과로 보았을 때, 혈액형과 성격에 관한 논문들 중에서 엄격하게 더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 실험은 없으며, 있다 하더라도, 성격은 다양한 변수를 모아놓은 주관적인 집합체이기 때문에, 종속 변수로 상정하기 힘들고, 아울러, 혈액형 외적으로 성격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인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니가 한 말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라고 이야기 해주자.

 

그러면 상대편은 똥씹은 얼굴을 하면서 "이 무슨 개소리야!!" 하고 답변할 가능성이 크다. 단, 간신히 잡은 소개팅에서는 그러지 말자.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 결국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가진 다양한 성격 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 맞는 것만 취사 선택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더블 블라인드라는 지식 체계를 갖춘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늘을 먹으면 피가 맑아진다느니.. 죽염을 먹으면 건강이 좋아진다느니... 고문서에 적힌 약초나 이집트 시대 치료법들은 가차없이 더블 블라인드 탈락인 셈이다.

 

그렇다고 무작위로 이게 효능이 좋다고 더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는 것 역시 국력과 세금의 낭비이다. 과학적, 의학적으로 검증된 근거있는 실험을 통해서 엄선하고 정제되어도 탈락하는 것들이 많은 것이 연구이고, 신약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어떤 게 몸에 좋다. 사실 몸에 좋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주 주관적이다. 어떤게 좋은건지???? 나는 몸이 좀 아파서 학교 결석하고 집에서 만화볼 때가 제일 좋던데 

 여하튼, 결론은

 

더블 블라인드가 아니라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지 말 것 (근데 콩으로 메주를 쓰는 건 믿어도 될 듯).
그 데이터 안에서도 어떤 변수(통제 변인)가 결론이 될 만한 변수(종속 변인)를 건드릴 여지가 있다면, 의심하고 볼 것.

그리고 혈액형으로 성격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날려줄 한 마디는 꼭 기억해 두자.

 

"개소리 하지마~ 이 고조선에 태어나서 청동기 숟가락으로 밥 퍼 먹을 무식한 놈아~(때로는 "년"이 될 수도 있다. 뜬금없이 병신년 새해복~) 혈액형 성격은 더블 블라인드 테스트를 안 했어!!! 그러니믿을 게 못된단다~"

 

P.S. 여기에 혈액형 성격 분석만 넣어 두었지만, 지역별 사람 성향, 민족별 사람 성향, 나라별 사람 성향 등 역시 딱히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특정 지역이나 나라에 국한된 문화로 인해서, 그런 성향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역시, 더블 블라인드로 변인 통제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아요. 아울러, 사람 역시, 제가 직접 그 사람을 겪지 않았다면, 좋은 소문은 참고하지만, 나쁜 소문이나 좋지 않은 루머들을 가급적이면 저는 믿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그것 역시 그 사람을 겪은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그러해요.

 

이 글을 많이 퍼가도 됩니다. 개인적으로 혈액형 성격 분석은 일제 시대 유물 청산보다도 더 사라져야 하는 엉터리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러해요.

 

 

논문을 쓰면서 나오는 오픈 액세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해요.

 

다양한 출판사들이 있고, 일부 어처구니 없는 기사들을 읽기도 한 김에, 논문과 얽혀 섥혀 있는 이야기 썰을 하나 풀어볼께요.

 

일반적인 학술 논문은 이런 형태를 통해서 흘러 갑니다.

1. 정부에서 과제 신청을 통해서 연구비를 받는다.(연구비 수주)
2. 연구비를 통해서 신나게... 혹은 꾸역꾸역... 연구를 수행한다. (연구 활동)
3. 데이터가 좀 쌓이고, 무언가 보고할 만한 밑밥(?)이 생긴다. (학술적 발견)
4. 그 밑밥을 내 줄 출판사를 알아 본다. (취미 생활(???))
5. 출판사에 그 밑밥을 던져보고, 덥썩(?) 무는지 알아본다. (서브미션)
6. 출판사가 밑밥을 물면, 리비전과 여러 서신 교환(혹은 쥐어짜기)을 통해서, 특정 저널에 게재 허가가 난다.(억셉!!! 오예!!!!!!)
7. 일부 편집을 거쳐, 출판사가 발행하는 특정 저널에 게재가 되면, 논문을 쓴 과학자들이, "게재료"를 내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논문이 실리게 된다. (출판)
8. 그 실린 논문을 통해서, 다시금 1번 과제를 "무한" 반복한다. (노예 -.-;;;)

가 될 겁니다.

 

자, 그런 과정에서 이제, 출판사와 연구비를 부담한 정부, 그리고 논문을 쓴 사람 이 세 사람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번째, 출판사. 논문을 게재하는데 민간 기업인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적정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노동력 혹은 "돈"이 필요합니다. 논문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논문의 수준도 유지해야하고, 광고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높은 질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좋은 에디터와 학술 전문가들을 고용하기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경우에 논문이 아주 유명하다면, 끊임없이 논문을 쓰고 싶어하는 과학자 노예(?)들이 존재하고, 논문에 광고를 실어서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 정부 혹은 연구비 제공 기관. 연구비를 제공한 기관은 기본적으로 연구비가 제대로 쓰여졌는지. 그리고 이 연구비를 통해서 과학 지식의 발전, 혹은 소기의 기대성과를 얻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연구자에게 다양한 심사나 계획서를 요구하기도 하고, 가끔은 쓸데없다(?)는 평가를 듣는 허례허식뿐인 보고서를 연구자들(또 다른 노예?)에게 쥐어짜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돈을 주는 물주이기 때문에, 자신의 돈이 제대로 쓰였는지를 알고 싶어하고, 이 부분은 대부분, 수준 높은 저널에 결과가 보고되거나, 돈이 되는 특허를 만들었는지 혹은 산업화가 되었는지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번째, 논문을 쓴 사람 혹은 과학자. 과학자는 필연적으로 연구비를 수주해서, 그를 통해 연구를 한 후에, 그 연구를 어떤 형태로든지, 일반에게 공개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언급한 "무한" 반복 노예(?) 행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연구를 논문이나 특허의 형태로 보고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논문이 수준 높은 저널에 실리기를 바라고, 이는 결국 후속 논문을 위한 연구비를 신청할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연구를 잘하고, 연구비를 잘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연구를 마무리 잘 해서, 수준 높은 저널에 내어서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세 주체는, 연구라는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이해 관계에 얽혀져 있고, 이는 세번째 주체인 과학자들의 경쟁으로 인해서, 더 복잡해 집니다. 수준 높은 저널에 출판될 수 있는 논문 수는 한정되어 있으며, 과학자들에게 나누어줄수 있는 연구비 역시 제한적이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조금 더 가치있음을 은연중에 수준 높은 저널을 통해서 자랑(?)하는 것이지요.

 

이 세 주체의 상황에서 저작권이라는 기본 개념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작권은 어떤 지적 생산물을 만든 사람에게, 그 이득을 돌려주게끔 만드는 권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컨대, 음악을 만든다고 했을 때, 음악을 작곡한 사람, 그리고 작사한 사람, 그리고 그 음악을 부른 사람(이건 정확하게 "실시권"이라고 해야 맞지만, 편의상 그냥 넘어 갑시다!!) 등등, 이 사람들이 곡을 만들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 음악 하나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 음악을 좋아하고, 구입하면서 발생하는 이득의 일부를 돌려주는 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음악 유통을 하면서 저작권 수입보다 더 큰 이득을 얻는 집단(멜..머시기)도 존재하고, 뭐.. 착취니 뭐니.. 안 좋은 일도 발생합니다만... 여하튼, 이런 저작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새로운 지적 생산물이 나타날 유인 동력이 줄어들게 됩니다. 열심히 만들어 봐도 나한테 돌아오는 게 없는 상황인데, 굳이 애써 새로운 걸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공산당이 싫어요!!!!!)

 

하지만, 이런 저작권의 개념은 과학으로 오게 되면, 위 세가지 주체의 이해관계 그리고 관행으로 인해서, 살짝 다른 개념으로 바뀝니다. 물론, 표절 이런 것도 여기에 끼여들 여지가 생기게 되요. 하지만, 오늘은 좀 가볍게 저작권만 다루어 봅쉬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연구자들"은 "정부"의 돈을 받아서 민간 단체인 "출판사"에 연구 내용을 보고해요. 그리고 이때 출판이 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저작권을 "출판사"에 무상으로 "양도"합니다. 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이거지요. 역시 제대로된 노예~ !!!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출판 과정에서 게재료라는 이름으로 돈은 내기까지 합니다. 오홍~ 연구 결과도 주고 그거 내달라고 돈도 주고, 저작권도 양도하고~ 오~ 일타 삼피!!!!

 

근데, "이 저작권을 내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는 경우가 있느냐?" 라고 한다면,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아요. "이게 올바른 것이냐?" 라고 한다면, 여러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 논문이 가지고 있는 공공성에 근거해서, 자신의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개념도 들어가 있는 셈이에요.

 

물론, 안타깝게도, 이 저작권을 출판사에 양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출판사 입장에서는 이 양도된 저작권을 통해서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고, 구독권을 통해서 장사를 하기도 해요. 더 웃긴 상황은 이렇게 자신이 쓴 논문이라 할지라도, 그 저널을 돈을 주고 "구독"하고 있지 않으면,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에요. 출판사 입장에서는 과학자가 어떻게 보면 호구이긴 해요~ "정주고 마음도 주고 사랑도 줬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 아.. 죄송합니다..-.-ㅂ)

 

근데, 생각해 보면, 이런 관행에서 돈은 정부가 내고 있고, 연구자는 열심히 연구해서, 출판사에 연구 성과를 갖다 바치고...(?) 출판사는 그 연구와 양도된 저작권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여요. 실제, 이런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인식해서 생겨난 개념이 바로 오픈 엑세스 운동이에요.

 

Open access 이건 출판권과 최신 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공개하자. 뭐 이런 거창한 가치가 있는데, 따지고 보면, 공짜로 논문을 보게 하자~ 뭐 이런 거예요.

 

시중에 보인는 PLOS genetics, PLOS biology, PLOS computational biology, elife 등이 대표적인 오픈 엑세스 저널들이에요. 이 논문은 기본적으로 연구자들이 연구 논문을 보고한 경우에 충분히 좋으면. 연구 논문을 출판하고,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논문을 제공하고 있어요.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그 저작권 역시 대중에게 공개해서, 연구 결과를 통해서 장사하는 "출판사"들에게 대항하고자 만든 단체같은 새로운 "출판사"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하지만, 문제는 이런 오픈 엑세스 출판사 역시, 다양하게 돈이 든다는 사실이고, 이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연구자들에게 일반 "출판사"들보다 더 많은 게재료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이 논문을 돈 주고 구독하는 독자들이 없으니깐요.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도서관에 팔아먹는 구독료가 쏠쏠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오픈 엑세스에 논문을 내면, 일반 출판사 게재료보다 많게는 5배 정도를 내야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추가로, 위에 언급한 논문들은 아주 좋은 저널이지만, 이렇게 이득이 없는 집단이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거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어요. 그러다 보니깐, 처음에는 반짝하다가, 나중에 그 유명세를 달리 하는 경우도 많아져요.

 

그럼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하면, 이 오픈 엑세스 논문에 연구 결과를 보고했는데, 돈을 내 준 정부 입장에서는, 왜 제대로 된 논문에 싣지 않았냐고, 구박(?)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어요. 그러니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잘 운영되고 있는, 민간 출판사, 예컨대, 자연이(Nature), 과학이(Science), 세포놈(Cell) 같은 저널의 문을 다시금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요.

그러니깐,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한정된 재화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물주(?)와, 그 재화를 받고자, 그리고 자신이 연구하는 것을 높은 수준의 논문에 싣고자 하는 노예(?)들, 그리고 그 재화를 이용한 연구를 홍보하면서 돈을 벌고자 하는 땟놈(?)의 "놈놈놈" 관계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발생하고 있는 문제(?)인 셈이에요.

 

그러면, 단순하게 정부나, 일부 학회가 좋은 출판사(?)를 사거나, 운영하면 되지 않느냐 라는 답이 나올 수 있겠죠. 네.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민간 학술지 지원 행위(?)가 바로 그런 행위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예상하셨겠지만, 이런 학술지 혹은 학회 지원이 눈에 불을 켜면서 돈을 벌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민간 출판사에 비해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이런 문제를 인식해서 최근에 막강 물주들, 독일의 막스 프랑크,미국의 하워드 휴지,그리고 영국의 웰컴 트러스트 이 세 기관이 합심해서 으쌰으쌰 만든 출판사가 eLife에요. 이 논문의 성과는 앞으로 조금 더 지켜봐야 겠지만, 새로운 리뷰 문화를 만들고 있는 등, 아직까지는 평이 아주 좋은 편이에요. 하지만, 이 안에서도 자연이, 과학이 세포놈을 선호하는 현상은 여전하다는 사실이 맹점이라면 맹점이에요.

 

이 문제는 너무나도 고착화되어서 쉽게 풀수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에요. 논문을 만들어 내는 연구자의 저작권도 고려해 보아야할 문제고, 저 저작권을 통해서 이득을 벌어들이는 출판사에게 어느 정도 이득을 줘야하는지도 문제이고. 돈을 주는 정부나 기관 역시 어떤 연구가 좋은 연구인지를 단순히 논문으로 평가하지 않아야할 책무도 있는 셈이에요.

다만, 왜 돈은 내가 주는데, 출판사가 돈을 버냐? 내가 호구(?)냐? 하는 기관들이 많아져서, 최근에 이런 저작권 문제가 대두되고 있어요. 나에게 저작권을 돌려달라~~~~ 아울러, 연구 결과의 공공성을 많은 사람이 인지해서, 출판사의 논문 출판 전의 프리 프린트(pre-print)의 형태로 공개할 수 있는 사이트들(예컨대, NCBI Pubmed, ResearchGate 등) 생겨나서, 꼭 출판사의 논문이 아니더라도, 특정 펀드의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의 논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효율성은 떨어지기 때문에, 논문의 접근도는 떨어져요.

 

여하튼, 이런 문제는 기본적으로 구조적인 해결책과 다양한 의논을 통한 강력한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데, 과학을 열심히 하는 다양한 연구자들이 이런 부분에 신경쓰는 것이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런 오픈 엑세스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 두는 것도 괜찮겠죠? 

http://elifesciences.org/about

 

About

eLife is an initiative from research funders to transform research communication through improvements to science publishing, technology and research culture.

elifesciences.org

참고로, elife 페이지를 링크해 뒀어요. 관심 있으신 분들을 들어가 보세요.

P.S. 근데, pain-free publishing이라고 하는데... 페인 프리는 개뿔!!!! 리비젼 완전 빡세요~ ㅎㅎㅎ

내가 하버드에서 본 일이다.

 

늙은 포닥 하나가 대학 도서관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꼬깃꼬깃한 논문 한 편을 내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논문이 SCI인지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도서관 사서의 입을 쳐다본다. 도서관 사서는 포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중국인이 공유한 SCI 엑셀 파일을 두들겨 보고

 

"좋소."

 

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논문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행정실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그 논문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SCI급 논문입니까? " 하고 묻는다.

 

행정 실장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논문을 어디서 훔쳤어?" 포닥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말이냐?"

 

"누가 SCI 논문을 그냥 주나요? 서브미션하면 피어리뷰는 안 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포닥은 손을 내밀었다. 행정 실장은 웃으면서

 

"좋소."

 

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논문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 보는 것이다. 거친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논문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공동기기실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클린 벤치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논문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 줍디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1저자는 뺏어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논문을 줍니까? PCR (Polymerase Chain Reaction) 사진 한 장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논문 코멘트 한 마디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세포 하나 하나 비교해 가며 Immuno 사진을 한 장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In vitro Figure 10장으로 In vivo 마우스 데이터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논문 (論文)' 한 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논문을 얻느라고 여섯 번 리비전이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논문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논문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논문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알파카 MD and PhD 페이스북에 있는 원글

 

과학자들은 다양한 동기로부터 연구를 시작한다. 그것은 학문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가장 이상적인 사례다!), 졸업, 승진/취업, 또는 연구비 수주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그냥 해야 되나보다 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봤다. 이렇게 다양한 동기로 시작된 연구의 끝은 하나로 수렴한다. 논문 출판. 자기가 얻은 결과를 정리하여  자신의 언어를 통해 다른 연구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줌'으로써 끝나는 것이다연구를 '계획'하고, 이론 작업이나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얻고', 이를 해석하여 '새로운 지식' 을 얻는 과학적인 활동은 일면 격식을 차린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문적 성과는 최종적으로 논문으로 정리된다. 따라서 '훌륭한' 과학자는 '효과적인 논문 작성' 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진행한다. 훌륭한 과학자는 결국 효과적인 글쟁이다.

(출처 - 링크)

논문을 통해서 전파되는 '새로운 지식 발견'의 영광은, 논문을 작성한 '저자'에게 돌아간다. 특히나 저자가 많은 '의생명과학' 논문들의 credit은 제1저자 (first author), 마지막 저자 (last author), 그리고 책임저자 (corresponding author) 가져가는 일이 많다. 보통은 마지막 저자가 책임저자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 저자가 그 연구의 전체 책임자이다. 제1저자는 보통 그 연구 자체를 일선에서 직접 수행한 박사과정 학생이나 박사후 연구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중간 저자는 제1저자와 마지막 저자가 아닌 저자들이다.

우리의 비극은 한 연구의 수확이 '논문의 특정 저자'에게 불균등하게 돌아가는 데에서 시작한다. 한 연구를 마치는 데 참여한 개개인 과학자의 공헌을 수치화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동연구가 더 많아지고 있는 최근 연구에서는, 심지어 저자들 사이에서도 누구의 기여도가 더 큰지 알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논문을 읽는 독자들은 수 많은 저자들 중 누가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알 방법이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사람들에게는 앞뒤 다 자르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만 남아있기가 쉽다. "A 교수" 그룹에 있는 "B" 연구자가 "C"를 발견했대. 다시, "A"는 마지막 저자나 책임저 자일 가능성이 높고, "B"는 제1저자이다. 졸업/승진/취업/연구비수주 등 논문으로 파생되는 다양한 과실을 얻기 위하여 현대의 과학자는 논문의 "중요한 저자"가 되어야만 한다. 연구를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논문의 제1저자나 교신저자가 되는 순간, 그 연구의 영광을 대부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학계의 일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문의 '저자됨 (authorship)'을 가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본다.

First authorship이나 corresponding author를 놓고 공동 연구자들 끼리 또는 심지어 같은 실험실 안에서도 science와는 거리가 먼 눈치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주 드물지 않게 공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명예 저자'가 되는가 하면,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불합리하게 저자 목록에서 빠질 수도 있다 (유령 저자). 자신이 기여한만큼 좋은 authorship을 갖지 못했다는, 교수님이 내 연구성과를 논문이 간절히 필요한 (졸업 등을 위하여) 누구에게 주어버렸다는 볼멘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좋은 authorship을 향한 경쟁은 현대를 살아가는 과학자들에게 불가피한 것이지만, 의외로 이를 명확히 정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은 없다. 그리고 소위 'MD lab'에서 일어난다는 많은 분쟁(?)들도 기원을 찾아들어가면 'authorship' 인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직 연구 책임자 급도 아닐 뿐더러 학위과정 초기부터 시작해도 아직 채 10년이 되지 않은 초짜 과학자일 뿐이지만 (그래서 authorship을 정할 위치는 아니지만...) authorship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은 가지고 있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authorship을 어떻게 정하느냐는 현실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활발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최종 authorship 결정 권한은 연구 책임자에게 있다.

모든 저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결정은 연구 책임자가 내린다. 이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만약 연구 책임자가 공정하지 못한 사람일 경우, 열심히(!) 연구한 사람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이나 연구원은 본인이 아무리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도 현실적으로 그 결정에 반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를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그 연구실에 합류하기 전, 지금까지 쭉 그 실험실의 authorship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publication들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실험실 사람들과 인터뷰하면서 그 실험실의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공정하지 못한 실험실이라고 판단되고 자신이 authorship에 민감할 경우 그 실험실에 합류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런 것도 알아보지 않고 덜컥(!)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은 조금 어리석은 일이다.

2) First author는 논문 draft를 직접 작성해야 한다. 

"논문"의 "제1" 저자이다. 첫번째 저자가 논문을 직접 작성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이상하다. 개인적으로는 실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것 만큼 '논문'을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논문을 직접 쓴 사람은 그 연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어떤 display item (figure/table)을 어떤 위치에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어떤 story를 만들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한데 녹여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이것은 실험을 직접 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고 고통스런 작업이다.

자신이 first author가 될 정도로 이 연구를 이끌어왔다고 생각한다면, 논문을 쓰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Draft를 쓰지 않았다면 first author가 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난 크게 이상할 게 없다고 본다. 연구 책임자의 스타일상 책임자가 직접 논문을 쓴다면, 적어도 main table 과 figure들은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도 논문의 draft를 직접 쓰는데 참여하도록 지속적으로 시도하여야 한다. 

3) 책임저자 그리고 마지막 저자.

사실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저자는 그 연구그룹에서 가장 senior로서 연구를 주도하였거나, 가장 큰 연구비를 마련한 사람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본다. 두 세 연구팀이 공동 연구를 하였다면, 공동 연구팀의 책임자들이 책임저자를 공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드문 경우로 그 연구가 책임senior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실질적으로 주도되었다면, 마지막 저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책임저자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4) 중간 저자

어려운 문제이지만 연구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한 사람이면 저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지식'생산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예를 들면 중요한 샘플을 제공하였다든가 의뢰를 받고 단순 실험을 한 경우에도 실질적으로 이들이 도움이 없다면 연구를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원할 경우 중간 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느 선까지 저자가 될 수 있느냐는 연구 책임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 사람의 과학적인 성과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혹시 논문 한 두 편 정도야 우연히 좋은 저자가 될 수도, 반대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그 사람이 출판한 논문들을 모아놓고 보면 그 사람이 '평균적으로' 어떤 과학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따라서 authorship이 공정하게 정해진다는 '신뢰'가 있고 호흡을 길게 가져갈 수 있으며, 그 사람의 가치를 논문에 적인 저자 리스트가 아니라 실제 능력으로 결정하는 환경에서는 논문 한두편의 authorship에 크게 민감해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졸업/승진/취업/연구비 수주에 논문 편수와 impact factor, 그리고 authorship이 매우 중요한 것이 우리 현실이라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정답은 없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잘못된 환경들을 바꾸어 가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공정치 못한 연구 환경에서 authorship을 얻기 위해 분산되는 그 시간과 노력만큼 우리의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science를 바로 앞에 두고!


중국을 포함해서, 한국, 일본, 중국, 몽고, 대만을 미국에서는 동아시아(East Asia)라고 부른다. 일본과 한국, 대만, 중국 4개국을 극동 아시아(Far east)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중동(Central Asia)과 구분하기 위해서 위해서 쓰는 용어인 줄 알았다.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그리고 아시아로 나누는 입장에서는 한국은 아시아에서도 분명히 동쪽에 있는 것은 맞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였다.   

 

그리고 극동 아시아라는 용어 자체도 아시아 기준으로 본다면, 태평양과 접해진 동쪽 끝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을 했지, 지리적으로 극동이라고 불리는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 했다. 말 그대로, 용어가 그것을 의미하는지는 알았지만, 진정한 실체와 그렇게 불린 원인을 몰랐던 것이다. 사실, 미국, 유럽의 관점에서 세계 지도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일 수 있다. 

 

(네이버 지도 -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에 있다)

 

정말 우연하게, 네이버 블로그를 이용하면서 지도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어디 있는지 살펴보고 있는 도중에, 랩에 있는 대학원생 친구가 내가 보고 있는 "세계지도"를 보더니 너무 놀라는 것이었다. 이런 세계지도는 처음 본다면서. ^^ 왜 자신의 고향이 있는 멕시코가 동쪽에 있고, 한국과 일본이 지도의 중심에 있느냐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항상 보아왔던 세계 지도를 구글에서 보여 주었다.

 

(미국, 유럽, 아프리카가 중심에 있는 세계지도)


이 간단한 세계 지도 하나로 "왜 우리나라가 극동 아시아였는지"가 단숨에 해결되어 버렸다. 이 지도에서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지도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이 기준에서 보자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중국이 동쪽에 있다. 더 정확히 "극동"쪽에 있다. 그런 연유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4개국은 "극동" 아시아인 셈이다. 그들의 기준을 따르면, 지리적으로 완벽하게 우리나라는 동쪽에 있는 셈이다.  


사실, 모두가 알듯이 지구는 둥글다. 그리고 둥근 구체를 사각의 평면으로 나타내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지만, 홀로그램이 상용화되지 않는 한 모든 기록은 이차원 평면으로 남길 수밖에 없고, 세계 지도 역시 그 형태를 따랐다. 하지만, 세계 지도를 그리는 관점은 분명히 대륙마다 달랐고, 유럽과 아메리카의 시야는 우리나라와 너무나도 달랐다. 아프리카가 중심에 있고, 대서양이 지도 중간에 존재한다.  

 

우리네 입장에서는 아프리카와 미국이 아주 먼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 그들의 눈으로 보자면,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것이 아프리카로 가는 것이 훨씬 더 심리적으로 더 멀게만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단순한 지도, 시각의 차이일 뿐인데, 지도 하나로 나라를 접하는 심리적 거리감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정말 깨달은 바가 많았다. 단순히 세계 지도 하나이긴 하지만, 실제로 어떤 사물이든 관찰하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상황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가끔씩 논문을 읽다가도 특이한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논문에 나온 데이터가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아주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해석이 애매한 데이터 혹은 주장과 맞지 않는 데이터가 등장하는 경우에, Discussion 부분에서 주장에 맞는 해석을 끼워 넣는 것이다. 디스커션이라는 항목 자체가 최초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 근거를 추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디스커션은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 해석했다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견 역시 대가가 쓴 주장이라 할지라도, 항상 "세계 지도"처럼 보는 "관점"이 과학적 진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Dyson 사의 날개 없는 선풍기와 이름 없는 날개 있는 선풍기. 관점을 바꾸면 혁신이 가능하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다양한 데이터들 중에서 자신의 관점과 맞는 데이터만을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실험에는 분명히 시행착오가 존재하고, 그 과정에서 이 결과가 진짜 맞는지 확실할 수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스토리가 있는 상황에서 그와 상반된 데이터가 나온다면, 단순히 넘어가서는 절대 안되는 것 같다. 결국 그게 맞을 수 있고, 다른 관점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데이터는 데이터 자체가 일관되고, 누가 해도 재현 가능하다면은, 더 큰 발견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스토리와 반대되는 창의적인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는 다른 관점에서 세계 지도를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인 과학 상식이나, 당연히 알고 있는 지식들도 다른 직업에 있는 사람들이 관찰하면 전혀 색다를 수가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많이 하고 있고, 거기서 엉뚱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나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의 Casual한 만남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즐겁기도 하다. ^^   

 

우연히 나의 입장에서는 아주 독특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전자 제품이나 시중에 나오는 공산품들을 분석하는 세미나였는데, 정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많았고, 한동안은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이제는 식상해 보이기까지도 한, 다이슨의 선풍기는 "당연히 있어야 할 날개가 없는데, 아이들에게 날개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날개가 없는 선풍기가 있을 수 있어라는 고전적인 관점은 결국 극복되었고, 아주 창의적인 회사가 되었다. 혁신이랑 항상 이렇게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혁신은 패러다임 쉬프트를 유도한다.

 

당연하게 봐 왔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게 보지 않는 것!!!

 

직업을 가진 누구에게나 필요한 상식과도 같은 명제이지만, 결코 쉽게 가질 수 없는 습관 중 하나인 것 같다. 특히나, 사물을 해석하고, 자연 현상의 원리를 궁금해하는 과학자에게는 정말 더 필요한 능력인 것 같다.  

 

오늘부터 우리가 당연히 이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관점을 다르게 조금 비틀어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호주를 기준으로 보는 세계 지도 - 너무나도 독특한 시야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모든 것이 상대적일 수 있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오늘의 교훈.

공포영화의 단골소재. 특히나 요즘 들어 다른 애들에 비해 더더욱 자주 많이 대량으로 등장하는 좀비.
그들은 왜 살아있는 인간 포함 다른 포유류를 공격하는 걸까? 우아한 귀족같은 느낌의 뱀파이어야 신선한 인간의 피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좀비는 딱히 그래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뱀파이어물에선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의 공존(인지 인간 사육인지) 필요성에 대해 뱀파이어가 말하는 걸 가끔 볼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좀비에 의해 폐허가 된 도시엔 좀비외의 생명체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으며, 좀비들만이 꾸역꾸역 잘도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만약 좀비가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를 섭취를 못 해서 알아서 픽픽 쓰려져 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하지만 이제까지 나온 좀비물에서 그런 묘사는 내가 알기론 없다. 물론 살아 있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성분 중 무언가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가능성은 있지만, 자주 규칙적으로 섭취해야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굳이 섭취할 필요는 없지만, 살아 있는 인간이 별미라서 또는 엄청난 에너지 공급원이라서 인간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긴 하다. 이 가능성은 이 글에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그런데로 불구하고 좀비가 살아 있는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인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공포영화나 게임의 단골 소재가 된다.  

더 하우스 오브 데드. 오락실가면 한 판씩 하게 되는 그 게임.

그 목적이 불분명하긴 하지만, 일단 좀비라는 것들은 살아있는 당신을 발견하면 죽자사자 기어오든, 절뚝거리며 걸어오든, 덤벼오기 마련이다.

우리 이걸 맹목적 공격성이라 하자. 아니 맹목적은 빼자. 나름 목적이 있을 수도 있으니(.....). 요 공격성, 그것도 거의 자동반응적인 공격성은 육식동물의 공격성과는 다르다. 육식동물은 일단 다른 존재를 발견한다고 해서 바로 달려들진 않는다. 그 놈이 나한테 위협이 되는 놈이지, 나보다 강한 놈인지 아닌지, 지금 내가 배가 고픈데 먹잇감이 될 만 놈인지 어느 정도 을 본다. 그런데 이 좀.비. 라는 놈들은 그런거 없다. 옆에 동료좀비(좀비에게 동료의식이라는게 없겠지...)가 쓰러져 나가떨어지던 말던 당.신.을 향해 끝없이 끝없이 다가온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두가지 특징은 눈치챌 수 있는데, 좀비라는 놈들은 자기보호보능(모든 생명체에게 필수적인!)이 없다는 것과 공감능력(옆에 자기랑 비슷한 다른 좀비에 대한)이 없단거다. 이 두가지 특징은 고통을 못 느끼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팔다리가 총이나 도끼에 맞아 너덜거려도, 통증이 안 느껴지다보니 그냥 무심할 수 있겠다. 본인의 팔다리에도 그럴진데, 하물며 옆좀비의 파괴와 손상에 공감할 수 있을리가 없다.

자신의 하반신이 뜯겨지더라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기어오는 좀비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벌써 세가지 특징이나 잡아 냈다. 과도한 공격성, 그의 바탕이 되는 자기보호본능과 공감능력의 부재, 이 두 가지 부재의 전제가 되는 통증감각의 부재.

통증감각을 못 느낀다는 것 부터 보자. 통증을 못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코리안 좀비 정찬성과 관련한 포스팅이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그런데 이 통증을 못 느낀다는 것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특히 자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생명체에겐 말이다. 

실제로 선천적으로 통증을 못 느끼는 질환을 앓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 아이들 아주 살기가 힘들다. 안 아프니까 자기 눈을 찌르기도 하고, 칼로 팔다리를 그어 피나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도 하고, 불에 그을려 보기도하고, 일부러 그러지 않더라도 언제 다친지 모른채 상처가 곪기도 하고, 뼈가 부러지거나 관절이 어긋거나 몸이 성하지 않은 거다.

8세의 Gaby, 각막을 자꾸 긁어대는 바람에 왼쪽 안구는 들어내었고, 안구 보호를 위해 수경을 씌웠다.

 생명체가 자기를 유지하고 종족번식 또는 자기복제라도 하려면 이로운 걸 가까이하고, 해로운 걸 멀리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중 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좁게는 통증 넓게는 불쾌한 느낌이라는 거다. (그런데 좀비는 요걸 못 느끼기 좀비는 좀비 자신의 생존에 적합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서 좀비 바이러스 가설이 그럴 듯하게 먹히는 거다. 바이러스만 번식할 수 있다면 바이러스 숙주로서의 신체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말이다.)

통증과 자기보호본능은 이렇게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공감능력은 어떠한가? 사자가 동료사자의 고통에 맘 아파할까? 요건 신기하게도 얼마전에 쥐실험에서 증명되었다.

갇혀 있는 친구쥐를 구해주려는 우리의 서鼠선생

 <Science>에 실린 논문[각주:1]에 따르면 쥐만 하더라도, 좁은 철장에 갇혀 있는 쥐의 고통에 공감하여 풀어주려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포유류, 조류, 어류, 그 이하로 내려가면서 생각해보면 모든 생명체가 공감능력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극단적으로 단세포동물이 공감능력이 있을까? 그렇다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어느 정도 진화를 한 동물들, 적어도 두뇌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동물은 되어야 공감 능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통증을 못 느끼고, 공감능력이 없다는 것만으로 좀비의 공격성을 설명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걸  성향, 성격의 문제로  단순화 시키면 좋은 예가 있다. 피니어스 게이지 아저씨다. 

본인의 두개골을 뚫어버린 철근을 기념품처럼 들고 있는 게이지.

열차 선로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철근이 두개골을 통과하는 사고를 당한다. 그로인해 전두엽이 완전히 파괴된 게이지씨는 사고 전의 사려깊고 조용한 성격과는 180도 달라져, 화를 참지  못하고 폭언을 일삼으며 폭력도 서슴치 않는 성격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파괴되어 버린 전두엽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프로이트가 말한 Superego 또는 Ego나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의식 (Consciousness) 을 통합 관장하는 부위가 전두엽이라는 이론도 제기되는 만큼 전두엽이 우리의 Id 또는 폭력적인 본성을 억누르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자의 입장에서 뇌를 구별하면 위 그림과 같이, 신피질, 피질, 변연계영장류, 포유류, 파충류의 뇌로 구별할 수 있다. 전두엽 중에서도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은 영장류 이상의 동물에서 특히나 발달되어 있다. 이 부분들이 파괴되고 피질, 변연계 뇌만 남는다면 공격적 본성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고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쥬라기 공원의 티라노사우루스나 밸로시랩터를 상상해보자. 아니면 뱀이나 왕도마뱀, 악어를 상상해보자. 그 파충류들이 어떻게 당신을 대할 지 예측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예측불가능함에는 그들의 공격성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좀비는 인간의 죽어버린 신체로 보일 뿐 "육식파충류의 뇌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거기에 고통을 못 느끼는 특성까지 더해, 그 공포스러움이 배가되는 것 같다. 



  1. Empathy and Pro-Social Behavior in Rat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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