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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입학의 다양성. 근무력증 학생의 의대 입학

오지의 마법사 2020. 5. 28. 23:38

의대를 나오면 인턴, 레지던트를 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 때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뜩이나 적은 의국원, 혹은 전공의에서 한 사람이라도 휴가를 가게되면, 그 업무량은 인수 인계까지 합할 경우, 두배가 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휴가는 본인도 가게될 것이기 때문에, 쌤쌤(?)이 되지만, 과연 이런 일이 전공의 기간 동안 꾸준히 이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그 상황을 사회적인 가치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까요?

 

박민우 선생님이 최근에, 연세대 의대를 입학한 전병건 군의 상황을 보면서 만든 가상의 "픽션"이지만, 한 번 쯤은 생각해볼 글일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는 성공적인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개인의 피해를 감수할 만한 이타심 체계가 잡혀져 있는가... 이타심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이런 상황을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사회 시스템 문제라고 하지 않고, 개인 탓만 하는 현실은 아닌지.. 라는 고민을 던져 보면서 글을 공유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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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애를 딛고 명문대 의대에 합격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증상이 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야 자신의 천형(天刑)이 선천성 근무력증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는 병을 형벌로 생각하지 않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했다. 근육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는 대신 생각을 많이 했다. 국어와 영어 같은 언어 사고 능력이 중요한 과목에서 그는 남들보다 단연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수학은 가끔 긴 계산을 필요로 하기에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그에게 결코 쉽지 않은 과목이었으나 그 또한 대부분의 계산을 암산으로 해냄으로써 극복했다.

그는 자신의 학교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최종적으로 명문대 의대에 합격함으로써 모든 세상의 주목과 축복을 받았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어 자신의 질병의 원인을 찾고, 자신처럼 고통받는 이를 치료하고 싶다 말했다.

과연 그가 입학한 학교는 명문대가 맞았다. 단순히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놓은 학교가 아니었다. 이 학교에선 신체적 약자가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었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과 제도가 잘 구비되어 있었고 그는 자신의 신체적 불편함 때문에 학업을 방해받는 일이 없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으레 이기적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노력해본 적 없는 사람들의 질투와 편견이리라. 의과대학교수들뿐만 아니라 입학 동기, 선배, 후배들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동기들은 빠른 속도의 수업 내용을 제대로 받아 적지 못하는 그에게 필기 복사본을 구해다 줬다. 해부학, 조직학 실습에서도 동기들은 그를 도왔다. 그는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 실습 시험을 무난히 치를 수 있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진급하여 졸업을 앞두게 됐고 의사 고시를 준비하게 됐다.

여태까지 잘 해낸 그였지만 의사 고시엔 그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잘 해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의사 고시엔 실기 시험이 있는데 그중 OSCE는 실제 환자 모형을 두고 처치를 해야하는 시험이었다. OSCE의 여러 항목이 완력과 정교한 손놀림을 필요로 했다. 예를 들어 심폐 소생술은 실제 흉부 압박을 5-6cm 깊이로 분당 100-120회 시행해야 했는데, 이것은 선천성 근무력증인 그가 결코 해낼 수 있는 술기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봉합술, 혈액 배양술 등도 자유롭지 못한 손놀림을 가진 그에게는 장벽이었다.

그가 속한 의대의 교수들은 회의를 열었고 한국 보건 의료인 국가시험원과 접촉했다. 학교가 입학 시켰으니 의사 고시도 마땅히 학교가 책임져 합격시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국시원에 그의 특별한 사정을 알려 그에게만 특별히 물리적 힘이 필요하지 않은 항목들로만 출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국시원도 출제위원들을 모았고 며칠을 토론했다. 한 사람에게만 시험 항목을 선별해 출제한다는 건 찬반이 어느 정도 엇갈린 일이었다. 하지만 국시원도 언론이 주목하는 그의 어떠한 상징성에 압박을 받았고 결국 그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항목만을 출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의사 시험에 최종 합격했고 다시금 6년 만에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부터였을까, 그는 가끔씩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서늘한 느낌을 등 뒤로 받아야 했다.

입학 때부터 그의 꿈은 재활의학과 의사였다. 간혹 주변에서 의사가 되어 겪는 신체적 피로와 한계는 학생 때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며 그냥 인턴을 하지 말고 기초의학으로 빠지는 게 어떠냐고 말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까지 해냈는데 앞으로도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으로 그는 망가져갔다. 육체는 이미 굳어있었기에 정신이 망가져갔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병원은 학교와 다르게 이론보다 몸이 먼저 튀어나가야 하는 전쟁터였다. 내과 인턴을 돌 때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수십 개의 정맥혈 채혈, 동맥혈 채혈을 마쳐야 했는데 그에겐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가 하지 못한 몫은 고스란히 동료 인턴의 몫으로 넘어갔다. 그의 동료 P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힘든 낯을 하나도 비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동료 L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L은 타교 출신이었고, 그와 어떠한 정신적 유대를 갖기도 전에 그의 일을 떠맡아야 했다. L은 대놓고 그에게 적의를 표하진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대놓고 살갑게 굴지도 않았다.

대놓고 그의 인턴 스케줄을 거부하는 과도 있었다. 몇몇 수술하는 과들은 애당초 우리 과 일을 도울 수 없으니 다른 인턴으로 스케줄을 바꿔달란 요청을 했다. 이건 하겠다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의 의지는 무시되고 스케줄은 조정됐다. 그가 빠진 정형외과, 신경외과, 성형외과는 다른 인턴들이 두 번씩 도는 것으로 결정됐다. 서서히 원망의 목소리가 병원에 깔리기 시작했다.
학생 동기들은 이타적이었으나 의사 동기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기적인 게 아니고 이타적이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쉬지 못하고 자지 못한 동기들은 더 이상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으므로 결코 이타적일 수 없었다. 동기들은 차츰 그와 엮이면 피곤하다는 걸 알게 됐고, 그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인턴이 실수할 때마다 대놓고 욕을 하는 모과의 레지던트도 그를 의식하여 그에게만은 욕하지 않았다. 병원의 야만이 그만은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때마다 그는 말이 아닌 모멸의 시선을 받았으므로 야만은 감춰져 있을 뿐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의 주치의였던 소아 신경과 교수 C는 넌 수술만 빼고 다 할 수 있을 거라 말했었지만, 결코 이런 것들은 말해주지 않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육체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인턴 생활도 2/3가 지나가고 원서를 넣을 때가 됐다. 그는 언제나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길 바랐지만 재활의학과에 지원할 수 없었다. 그의 선발을 막은 건 병원도 교수도 아니었다. 그건 의외로 학생 때 그에게 잘해주던 그의 선배들, 즉 재활의학과 레지던트들이었다. 교수들은 존스홉킨스 이승복 교수를 예로 들며 그를 선발하면 의국도 돋보일 거라 생각하고 그의 선발을 바랐다. 하지만 실제로 바쁘게 일을 하는 레지던트들은 달랐다. 레지던트들은 그가 의국에 들어옴으로써 그가 하지 못하는 여러 일들을 자신들이 떠맡아야 함을 예상했고, 때문에 교수들의 결정에 반발했다. 교수들과 레지던트들의 의견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거기에다 재활의학과는 하겠다면 그냥 시켜주는 비인기과가 아니었다. 그 말고도 재활의학과를 바라는 인턴들은 많았으므로 더욱 그의 입장은 곤란해졌다.

그는 처음으로 포기란 걸 했다.

그는 재활의학과에 원서를 넣지 않았다. 대신 모교 생리학 교실 교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생리학 교실에 들어가 근무력증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꿈의 한 조각이 빠져나간 그는 비틀거렸지만 그제야 비로소 야만의 정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편안해졌다. 그는 한 번 실패했을 뿐이었고 결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무력한 근육에 힘을 들여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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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joins.com/article/19230239?fbclid=IwAR1I1CkeDbRhSxrTdWPkAxS177yAn9xR_CjortzslTiDyJpW0dIe8jkOkP4

 

“내가 걸린 근무력증 원인 찾겠다” 장애 딛고 의대 진학

연세대 의대에 합격한 전병건군은 “장애를 겪는 친구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연세대 의대가 태어날 때부터 근무력증을 앓아온 서울 동성고 3학년 전병건(18)군을 올해 수시모집 신입생으로 10일 선발했다. 근무력증 환자는 작은 힘은 쓸 수 있으나 큰 힘은 쓸 수 없다. 부축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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