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조금 그랬었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1시간 정도만 같이 일을 해보면 이 사람이 나랑 맞을지 안 맞을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분은 그 사람이 유능하냐 아니냐에 큰 상관이 없다. 스타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세상에 나와 안 맞는 사람이 분명히 있긴 있다. 특히 이기적인 사람과 같이 일을 하면 확실히 피곤한 것은 사실이다. 이기적이다는 말은 개인적이다는 말과 약간 경계를 넘나들긴 하지만, 확!실!히! 이기적인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험실 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공동으로 해야하는 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일은 누군가의 몫이고,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일은 실험실이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만드는 일이고, 꼭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에 안 할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해야만 한다. 

아주 사이가 좋고, 이기적인 사람이 없어서 다같이 즐겁게 하면 좋겠지만, 사람일이 꼭 그렇지 않다. 항상 Free Ride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일이 많고, 무언가 자료를 모아서 결정을 해야하는 일이라면 더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결정권자가 가장 돋보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이기적이고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가 다른 사람이 결정을 위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많은 노동을 해야만 한다. 소위 말하는 노가다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수직적인 구조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결정권자라는 말은 경험이 많고, 많은 경험을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리이기에, 꼭 일을 많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갭이 비교적 크기에, 쉽게 그 결정권자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수평적인 구조에서도 꼭 결정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노가다를 해서 모인 자료를 통해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본인은 자료는 모으지 않고... 결정만 하겠다고 하면 외부적으로 보기에는 마치 일을 많이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일들이 지속되면, 결과적으로 그 사람과 일하기를 꺼려하게 된다. 특히나 똑같은 보상을 받게 된다면, 더 손해보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일이란 것이 서로 다른 수준이 존재한다. 결정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통합적으로 판단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제대로 잘 하려면, 분명히 어렵다. 

잘못된 결정은 삽질을 많이 하게 만들고, 제대로 결정하면 한 번에 될 것을 서너번 삽질하게 만든다. 밑에 일하는 사람이 일을 그르치면,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하지만, 많은 사람을 이끄는 리더가 일을 그르치면,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끼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실험실에서는 최소한 박사 2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나 그 이후에 이런 결정에 많이 노출되면 좋은 것 같다. 그전에 결정을 많이 하려고 하면, 실제적 실험에서 깨달아야할 시행착오를 안 겪어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임상에서 실험을 시작했거나 큰 랩에서 많은 연구원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인데, 이 부분 (2-3년에 걸친 육체적 실험을 통한 시행착오) 을 겪어야만 자신과 같이 일하는 연구원의 실험 시행착오를 수정 - 코멘트해 줄 수 있다. 안 그러면 탁상 공론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이 부분 때문에, 많은 PhD 선생님들과 MD 선생님들의 의견차이라든지, 반목이 발생하는 것 같다. 

공동 연구를 할 때, 결정권을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은 굉장한 신뢰다. 특히나 같은 랩에서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실험을 타인에게 맡기면 내가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이 잘 처리되거나, 그 사람이 자기 일처럼 열심히 일해줬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은 마음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쓰고, 일을 전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공동 연구, 혹은 랩에서 같이 일을 할 때는, 조심히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그 기술을 익혀서 본인이 직접하는 것이 훨씬 더 결과가 빠르기도 하고 배우는 것도 많다. 


반대로, 멘토나 PI의 입장에서도 공동연구 혹은 랩내 co-work을 도모할 때, 많은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사람은 자신에게 오는 이득을 많이 고려하고, 가용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길 원한다. 물론, 아무런 조건없이 도움을 주고, 그 안에서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졸업을 위해 매진해야만 하는 학위 기간과 성과를 위해서 달려야하는 포닥 기간 동안, 기부와도 같은 도움을 PI가 그냥 바란다면 아주 힘들어 하는 경우가 생기고 심한 경우에는 일이 안되는 경우도 생긴다. 일에 따른 인센티브(경제적 혹은 업적면)는 물론, 이 프로젝트가 왜 필요한지 완벽하게 이해시켜서 프로젝트를 Promising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물론 항상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동 연구 역시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교수들이나 PI들은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고민해보고 추진하기 마련이지만, 포닥이나 학위 과정생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무언가 하고 있는 일이 있고, 그 일들의 진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공동 연구가 끼어들면, Main 일이 늦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물론, 공동연구로 대박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일반화하긴 어려운 일이다.

공동 연구를 추진할 때는 다른 과 일을 할 학생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프로젝트로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일에 따른 authorship과 기여도를 사전에 어느 정도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아니면, 최소한 귀뜸이라도 해주면 좋을 듯하다. 실컷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한다고 했는데, 자신이 main이 되지 못하는 경우에 학생이나 연구원이 느끼는 배신감은 생각보다 크다. 배우고 경험을 쌓았다고 하기에는 보낸 시간과 투여한 역량이 아깝다고 느껴지는 경우에는 씁쓸한 소주만 들이키게 된다. 


아주 주관적이긴 하지만, 내 스스로를 내가 평가한다면, 처음 공동 연구를 하거나, 만나서 일을 할 때는, 손해나 이득을 크게 따지지 않는 편이다. 내가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일을 되게 하고 돌파구를 찾다 보면, 내가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을 조금 더 하는 것은 큰 대수가 아니고, 결과가 나오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하다보면 일이 될 때가 더 많다. 

공동 연구를 하는 그룹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고, 거기에 따른 결과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 협조를 잘 하는 편이긴 하다. 물론, 사전에 내가 하기 힘든 일은, No를 하는 편이긴 하다. (우리 블로그에도 글이 있지만, 제대로 하지 못할 일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일단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무조건 책임지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일하는 과정은 항상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가끔씩은 free ride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추가로, 일을 안 하는 그룹원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고 그 결과 전체적인 일정이 딜레이되는 경우도 많다. 이 때, 그쪽에서 하는 실험 과정을 정확히 모르거나, 관련 지식이 전혀 없으면,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예전에 그 사람이 제대로 일을 하면, 10분만 투자하면 되는 일인데, 한달을 끌어서 내가 직접 그 랩에 찾아 간 적이 있었다. 그 쪽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렴풋이만 알고 있었고, 제대로 몰랐었다. 당연히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해야하는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에 대한 감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정작 가서 나타나니, 내가 보는 앞에서 10분만에 일이 끝난 경우도 있었다. 그것도 그 사람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내가 처음 이메일을 주고 일을 할 때 10분만에 일을 처리해 주었다면, 정말 멋진 공동 연구자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앞으로 그 사람과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주변 사람이 그 랩을 물어볼 때, 항상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 

공동연구를 하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말이 공동 연구이지, 실제로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두 극단에 있는 사람이 정말 열심히 해야지만 제대로된 시너지가 난다. 그렇지 않다면 일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시간 낭비에 재료 낭비 등 시도하지 않은만 못하게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또한, 공동 연구를 하면서 일처리를 미루고, 성깔부리고 투정하고... 질질 끌다가 일 마무리하고...해주기로 해 놓고서는 차일피일 미루고... 연락하면 그때서야 마지못해 일처리를 하거나, 안하무인격으로 일을 못하겠다 하는 사람. 정말 화가 난다.

반대로, 자신의 성격이 아주 나빠도, 일처리를 잘하는 사람. 당장 성과가 생기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에 살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좁고, 성격도 좋으면서 일처리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은 언제든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등장하면, 일처리를 아주 최고 수준으로 해결하지 않는한, 성격나쁜 사람과 일하기 보다는, 일처리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마무리가 좋은 사람과 일을 하고자 한다. (세상을 살다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니긴 하더라만...왜나하면 그런 좋은 사람은 항상 밀려드는 일로 바쁘기 때문이다. ^^) 성과가 많을수는 있어도,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사람이 자신을 꺼리고 있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게된다. 밑에 있는 학생들이나 포닥들까지 이 랩에서 논문만 내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Free rider. 

무임 승차는 처음에는 아주 달콤하다. 

차비가 굳었고, 그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탕을 살 수 있다. 


아주 달콤하고, 이득을 본 것 같다. 나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버스 운전사도 모르고 다른 승객들도 모른다. 오로지 나만 몰래 이득을 얻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뿐이다. 


지속되는 무임 승차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다. 


다만, 자신만이 여전히 몰래 이득을 얻었고,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생각할 뿐... 돌이켜 보자. 내가 밑에 사람들과 일하면서 무임 승차하지는 않았는지. 주변 사람들과 일하면서 무임 승차하지 않았는지... 공동 연구를 하면서 일을 딜레이하지는 않았는지... 인생 전체가 무임 승차는 아닌지... 

이런 글을 쓰는 나도 가끔은 무임 승차하지 않았는지 되돌아 본다. 무임 승차를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더 열심히 살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고맙게도 많이 존재하더라. 그래서 가끔은 나도 모르게 그들을 의지하게 되고,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일에서 있어서 만큼은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과 공동연구를 하고 싶다. 나 역시도 그런 마인드를 갖고 싶다. 



혹시 이 글을 처음으로 들어온다면 지난 포스팅을 참고해 보자. 

경제학은 어떻게 과학을 움직이는가?(1)

경제학은 어떻게 과학을 움직이는가?(2)

자 이제 대안에 대해 알아보자.  저자는 호기롭게 7가지 제안을 내놓는다.

1. 취업정보를 공유한다.

2. 연구비에서 교수급료로 지출되는 것을 제한한다.

- 미국의 경우 non-tenure 교수 연봉은 학교에 주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에서 직접 가져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한국은 따로 교수급료를 연구비에서 가져갈 수 없으니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3. 연구-훈련의 연결고리를 약화한다. 

- 인력양성소인 대학원과 연구를 위한 연구소 분리하자는 것이다. 물리학의 경우 페르미, CERN 등 유명한 연구소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GIST, DGIST 등등이 역으로 대학원, 학부기능까지 하거나, 하려하고 있다.

4. 대학원 지원금을 개편한다.

5. 연구자원센터 등 과학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정책을 만든다.

6. 공동연구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를 마련한다.

- 이것은 노벨상을 겨냥한 것인데, 3명까지만 공동수상자로 선정되는 웃기지도 않는 제한때문이다.)

7. 연구비 예산 사용처를 구체화한다.

보다시피 꽤나 현실적인 대안들이다. 몇가지 토를 달아보자. 

취업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우리나라 BK21사업이후 상당히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다. 당연하게도 BK21사업을 통해 대학원생들에게 인건비 지원을 한 정부가 그 대학원생들이 졸업하고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문제는 대학원생들의 취업이 졸업 직후에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도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사 졸업 후 바로 정규직 취업이 되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박사 후 연구원이라는 다소 불안정한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이후까지 구체적으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 몇년 동안 박사 후 과정을 거쳐 어느 대학, 또는 어느 연구소에 어떤 직급으로 취업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분야를 막론하고 이공계 석박사 통틀어 취업 조사해 통계 발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분야 별로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궁금하다면 KISTEP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라)  물리, 수학, 화학, 생물, 공학 등등의 계열 별로 말이다. 그래야 각 분야에 있는 학생, 대학원생들이 구체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며 과학도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원센터의 경우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개인적으로는 정부기관의 특성상 빠르게 기술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학 연구 중 글로벌 기술을 선도할 수 있는 high-end 급의 연구에 대한 자원을 적시에 적절히 지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연구와 실험을 하다보면 지금 당장 지원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항목을 미리 예상하여 신청하기는 힘든 경우가 많고, 그 지원이 연구와 발견 선점에 필수적인데, 그렇기 때문에 개별 연구자들은 정부기관을 통해 지원 받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른 경로를 통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는 상당히 좋은 생각이며, (개인적으로 이용해본 경험은 없지만) 실제로 생물학자원센터가 있기도 하다.  각 대학의 연구기관이 모든 장비와 모든 형질전환 쥐를 관리할 수는 없고, 과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며 매번 구비하기도 어려우므로 국가 차원에서 이런 자원을 구비하고 관리하는 것은 필요할 것 같다. 

참고로 미국에서 포닥을 하고 있는 오지의 마법사 이야기를 빌리자면, 미국은 이런 코어 형태의 연구자원센터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깝게는 학교 내에서 구성될 수도 있지만, 최소한 각 주별로 특히 바이오 분야에서는 마우스 facility가 이런 형태로 운영되어서 효율적으로 연구 자원을 적시에 공급하고 별도의 비용을 청구한다. 그 비용은 결코 싸지 않지만 개별적으로 구성하는 것보다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비용적으로도 비교 우위에 있기 때문에 자원센터 자체가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한다. 

연구비 예산 사용처를 구체화하는 것은 국가 단위에서는 필요할지도 모르지만,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이야기하자면, "개개 과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연구와 실험의 특성상 앞으로 예산 사용을 구체적으로 예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개괄적인 틀자체를 설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인건비를 제외한, 재료비, 설비비, 회의비 등등을 더욱 구체적으로 쪼개고 항목별로 구성하는 것은 연구 능력을 저하시킬 우려가 있다. 지금도 재료비, 설비비 등으로 나눠진 연구비를 1년 단위 결산할때 억지로 맞춰 쓰고, 맞지 않으면 용도 변경 신청을 하는데 생각보다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맞춰서 집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업체에 영수증 항목을 외상으로 이용하고 이월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드는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과학이라는 학문이, 또는 분야가 사회와 동떨어져 그들만의 객관적이고 우아하고 소위 과학적인 논리로 굴러가고 있지 않고, 도저히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필자의 서평은 성공이다. 

그런 관점에서 책에서 제시된 대안들, 그리고 필자가 단 투덜거림들의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국가' 또는 그에 버금가는 기관에 의해 주도되는, 또는 주도될 수 밖에 없는 대안이라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그 발전 양상을 보면, 그리고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이라는 것이 국가와 결부되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는 과학을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파악하고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연구비 투자한다. 그렇기때문에 과학을 수행하는 주체가 표면적으로는 과학자들로 보이지만, 실상 깊이 들어가 보면 국가의 의지가 상당히 반영되기 때문에 실질적인 주체는 국가[각주:1]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약간 관점을 바꿔보자. 과학의 결실, 그리고 부산물의 영향을 받는 것은 우리 모두, 즉 시민들이고 그 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 대학원생들 역시 시민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당연한 생각을 바탕으로 과학의 주체를 시민으로 재설정해서 태어난 개념이 시민과학 또는 대안과학이다. 과학의 주체를 시민으로 놓고자 하는 개념 또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언뜻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개념이 생소하다면, '독립'이라는 접두어가 붙는 무언가를 생각해보라. 독립영화, 독립구단, 독립예술 등등. 국가나 자본에 귀속되지 않고, 수행하는 주체 또는 영향받는 사람들만을 오롯이 위한 무언가. 이제 감이 오는가? 과학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공학에서는 제 3세계를 위한 '적정기술'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천문학에서는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의 성과로 알려지기도 했고, 환경 보건 분야에서는 '시민단체'들의 보고서나 성과로 알려지기도 한다. 이들 모두 주류과학계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주류 과학자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정치적인 영역이거나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주류과학 역시 완전히 순수한 지적 영역에 속할 수 없고, 국가 또는 연구비 지급 기관에 휘둘리기는 마찬가지라는 면에서 충분히 '정치'이다. 

과학은 '양날의 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고전적이고 닳고 닳아 빠진 그런 흔한 얘기로 덮어서는 안된다. 과학은 저 멀리 앞서 달려나가고, 그 결실을 정치가나 산업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된다는 진부한 얘기는 과학자들의 주체성을 몹시 훼손하는 것과 동시에 과학을 하는 행위의 정치성을 가려버리고 만다. 과학은 수행되는 순간, 아니 그 이전 단계부터 그 검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봐야한다.

그런 과학의 정치성을 인정하고 들어가면, 과학자가 취할 수 있는 입장과 층위는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험실에서 논문을 쓰고, 파이펫을 쥐고 실험을 하는 행위가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질질 끈 서평포스팅을 마친다. 


  1. 가만히 고등학교 시절 문과와 이과를 생각해보자. 국가의 의지를 수행하는 행정관의 대부분은 고등학교 시절 문과를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과학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을 것 같은 "문과"로 대변되는 행정관이 역설적으로 과학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은 어찌보면 아이러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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