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에서의 공부량 (객원 필진 윤홍균 선생님의 글)


윤홍균 선생님은 중앙대 의대를 졸업하시고, 서울 마포구에서 윤홍균 정신건강의학과를 운영하고 계시는 선생님이십니다. 의대에서의 공부량에 대해서 써놓은 글인데, 아주 큰 공감이 가서 저희 블로그에 포스팅합니다. 참고로, https://www.facebook.com/addictyoon 에 원글이 있습니다. http://yoonmaum.com/ 에 블로그도 운영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지만, 글을 쓰기는 사실 꺼려졌었다. 왜냐하면 요즘은 의대생이나, 의대생 아닌 사람이나 다들 공부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의대를 다니던 시절,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메디컬 드라마나 청춘 드라마와 현실은 많은 차이가 있기에 이 글을 남긴다.


이 글에서의 의과대학에서의 공부량은 전적으로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것임을 밝힌다. 그동안 학제는 많이 바뀌었고, 학교마다 다른 커리큘럼이 있기에 경험은 모두 다를것이라는 점도 이해를 바란다. 나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다.


의대에 입학했다. 정확히 의예과에 입학했다. 예과과정에서 공부부담은 별로 없다. 그래도 중요한 과목이 한과목 정도 있다. 가령, '일반 생물학'같은 과목이다. 이 과목의 공부량은 나머지 공부량을 다 합친것 정도 된다.


만일 일반 생물학과 5과목을 첫학기때 만난다면, 나머지 다섯과목 합친게 일반 생물학과 비슷하다. 이런 일반 생물학을 '메이저'라고 부른다.나머지 그러니까 컴퓨터 실습이나, 영어회화같은 과목들이 있었다. 이런 과목들이 마이너였다. 평소엔 수업을 듣는등 마눈둥하다가,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공부를 한다. 뭐 잘치면 잘치는 거고 말면 마는거다.


다음 학기가 되면 또 한가지 메이저 과목이 있고, 나머지 과목들이 있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그 마이너 과목들이 다 '일반 생물학'정도 된다. 그리고, 그 마이너들을 다 합친것이 '세포학'이라는 메이저 만큼 된다.


그리고 그 다음학기가 되면 또 메이저과목이 하나 생긴다. 마이나과목이 공부량은 또 그전 학기의 메이저 같은 것이다. 그런식으로 유전학이라는 메이저를 만나고, 뭐 그런식이다.


그러다가 본과에 진입한다. 예과를 벗어나서 의학과과정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진입하다'라는 표현을 쓴다. 본과 첫학기에는 네개의 메이저를 만난다. 해부학, 생화학,생리학, 조직학. 공부 량은 해부학이 가장 많다.


그런데 해부학에서 공부해야할 양은 그냥 예과때 배웠던것 전체라고 생각하면 된다. 3학기 정도동안 외웠던 분량은 한과목에서 외운다. 물론, 생화학, 생리학, 조직학도 많다. 그외에 여러 기타과목들도 있다. 이런것들도 공부할것은 많다. 해부학 만큼은 아니지만, 예과 메이저보다는 훨씬 많았던것 같다.


본과 2학년이 되면 병리학이라는 학문을 만난다[각주:1]. 병리학의 분량은 1학년때 메이져였던 네과목을 합친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여러 기타과목들이 있다. 뭐 계속 그런식이다. 전학기보다 두배 정도씩 차곡차곡 쌓인다.


급기야 본과 4학년이 되면, 정말 눈을 의심할수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첫시간에 평생을 어깨 수술만 하신것 같은 교수님이 들어오신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어깨수술 강의를 왜 한시간만 배정한거야?"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강의를 하신다.


그리고 두번째 시간에는 평생 손목 수술만 강의하신분이 들어오셔서 "손목 수술만 강의해도 하루를 잡아야되는데, 왜이렇게 시간이 없어?"하면서 엄청난 진도를 나가신다.


그런식으로 강의가 이어진다. 평생 혈액암만 연구하신분, 갑상선의 내과치료만 연구하신분, 갑상선의 수술치료만 하신분이 본인이 공부한 모든 것을 한두시간동안 적어놓고 나가신다.


한 교시가 끝날때마다 책이 한권씩 생긴다. 정말 시험기간이 되면, 시험범위도 잘 모르겠고, 내가 들은게 전 학기에 들은건지, 이번학기에 들은건지도 잘 모르겠더라. 수업을 들으면서 필기를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어느새부턴가 필기는 포기하고 그냥 듣는 거 정도하다가, 말다가 했던것 같다.


필기를 해봤자, 그게 맞는말인지도 모르겠고, 적다보면 진도나가있고, "이건 해부학 시간에 배웠지?" 뭐 이러시는데 전혀 기억은 없고, 뭐 그런식의 수업이 이어진다. 아이고 글쓰다보니 심계항진이 오네.


어쨌든 그렇게 본과 4년이 지나간다. 결론은 공부할게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이다. 학문은 점점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데, 의대 4년동안 모든 과의 지식을 한번씩을 훑고 가야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인것 같다. 뭐 어떻게 해야한다. 뭐가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의과대학의 공부량은 엄청나게 많았다.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공부량이 많은데 정말 대단하세요. 라던가 그런말은 사실 현실적이지가 않다. 사실 그렇게 될지 몰랐고, 설마 그렇게 많아지겠어? 에이..하면서 분량이 점점 늘었기 때문이다. 포기하고도 싶었고, 그만둘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뭐 따로 할것도 없어서 어쩔수 없이 졸업까지 떠밀려떠밀려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분량이 많았다고 다 공부한건 아니었다. 사람마다 공부량에는 어차피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적은 것은 "공부해야할 양"을 적은 것이다. 공부한 양은, 저것보다 확연히 적었다고 생각한다. 기억나는 것도 사실 별로 없다. 그냥 아 되게 많았네. 정도. 그게 나의 양심고백.


의대생 여러분, 공감하시나요? 


  1. 이는 의대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결과의 구성 

① 줄거리

② 내용

③ 결과 및 데이터

④ 결과 섹션의 조직

모든 실험이 미리 디자인되는 연구

한 실험이 다음 실험을 결정하는 연구

⑤ 강조

⑥ 길이

⑧ 그 외 고려해야할 세부사항들

자, 이제 결과 섹션이다. 사실 결과 섹션에서는 할 말이 참 많다. 결과의 구성법은 크게 2파트로 구성될 예정이고, 이후에는 그래프와 통계에 대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곁가지로 나가게 되는 그래프와 통계 파트에서는 가장 많이 쓰이는 통계 프로그램 중 하나인 graphpad prism 소프트웨어를 기준으로 통계처리와 그래프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이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해보자.

8-9월 연구비 신청들은 잘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모두 건승을 기원합니다. 


결과섹션은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연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을 그래프, 표, 그림등을 이용해서 제시하는 부분이며, 연구자에 의해 설계된 가설을 검증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가설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들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는가"가 이 부분의 가장 주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① 줄거리

우리가 다루는 논문작성법의 결과섹션은 가설을 검증하는 연구를 주로 지칭한다. 이는 한 실험의 결과가 다음 실험을 결정하는 것을 뜻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주된 줄거리는 "질문-수행한 실험-발견한 결과-대답"의 순으로 이어지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 형식이다. 


② 내용

결과섹션에 포함되는 가장 중요한 정보는 바로 결과이다. 하지만,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얻은 모든 결과를 기술할 필요는 없다. 결과 섹션에서는 서론에서 기술된 질문들에 대한 적절한 답을 제시하는 결과만을 보고하면 된다. 즉, 결과가 가설을 뒷받침하는지가 포함되어야 하며, 실험군 뿐만 아니라 대조군의 결과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러한 결과는 그래프와 표로 표기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약간의 데이터를 포함될 수도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참고문헌이 필요한 진술이 담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한 실험의 결과가 다음 실험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참고문헌을 통해 문맥을 자연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③ 결과 및 데이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결과와 데이터는 다르다. 데이터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 얻어진 사실로 수치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데이터의 경우는 측정된 그대로 표시하거나, 퍼센트와 같이 변형된 형태로 제시된다. 하지만, 결과 (Results)는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In the 20 control subjects, the mean resting blood pressure was 85 ± 5 (S.D.) mmHg. In comparison, in the 30 tennis players, the mean resting blood pressure was 94 ± 3 mmHg.

느낌 자체가 굉장히 건조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20명의 대조군에서는 혈압이 85 ± 5 mmHg였고, 30명의 테니스 선수들에게서는 94 ± 3 mmHg 였다."인데, 이는 해석의 여지를 독자들에게 넘기고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을 수도 있지만, 논문의 결과섹션의 기술로는 적합하지 않다. 즉, 테니스 선수들에게서 혈압이 높다는건지, 낮다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해주어야 독자들이 실험의 결과를 이해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교정해 보자. 

The mean resting blood pressure was higher in the 30 tennis players than in the 20 control subjects (94 ± 3 vs. 85 ± 5 mmHg, mean ± S.D., p < 0.02) 

이 교정문에서는 논점이 분명하다. higher라는 논점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논문의 저자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데이터는 괄호 안으로 옮겨졌으며 p 값을 포함하여 통계적 유의성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논문의 결과는 객관적인 데이터의 나열이 아니라, 데이터를 해석한 저자의 관점이 포함된 주관적인 서술이다.


④ 결과 섹션의 조직

이러한 결과의 구성은 대게 한 실험이 다른 실험을 결정하는 연구으로 구성되거나, 모든 실험이 미리 디자인되는 연구로 나뉜다. 각각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모든 실험이 미리 디자인 되는 연구

임상 논문들의 경우는 모든 실험이 미리 디자인되는 연구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에는 방법 섹션에서 연구디자인을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결과 섹션에서는 단순히 한 단락마다 한 가지 주제를 기술하기만 하면 된다. 결과의 순서는 시간적인 순서를 따르거나, 가장 중요한 것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의 순서로 기술하기만 하면 된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Efficacy analyses were performed on the intention-to-treat population. A survival analysis was performed after 414 deaths occurred, 37 months after the last patient was enrolled. The median overall survival in the ipilimumab–dacarbazine group was 11.2 months (95% confidence interval [CI], 9.4 to 13.6), as compared with 9.1 months (95% CI, 7.8 to 10.5) in the dacarbazine group, with estimated survival rates in the two groups, respec- tively, of 47.3% and 36.3% at 1 year, 28.5% and 17.9% at 2 years, and 20.8% and 12.2% at 3 years (hazard ratio for death with ipilimumab–dacarbazine, 0.72; P<0.001) (Fig. 1A). Ipilimumab was associated with improved overall survival across patient subgroups, including those defined according to age, sex, ECOG performance status, baseline serum lactate dehydrogenase level, and substage of metastatic disease (Fig. 2).

There was a 24% reduction in the risk of progression in the ipilimumab–dacarbazine group as compared with the dacarbazine group (hazard ratio for progression, 0.76; P=0.006). The median values for progression-free survival were similar in the two groups because the first assessment of progression occurred at week 12 after the true median. After the first tumor assessment, the Kaplan–Meier curves separated (Fig. 1B).

The safety analysis included all patients who underwent randomization and received at least one dose of the assigned study drug (498 patients). The adverse events reported in the safety popula- tion are listed in Table 3. Adverse events (all grades) for which there was a higher incidence in the ipilimumab–dacarbazine group than in the dacarbazine group included elevation of alanine aminotransferase levels (in 33.2% of patients vs. 5.6%), elevation of aspartate aminotransferase lev- els (29.1% vs. 5.6%), diarrhea (36.4% vs. 24.7%), pruritus (29.6% vs. 8.8%), and rash (24.7% vs. 6.8%). Grade 3 or 4 adverse events occurred in 56.3% of patients receiving ipilimumab plus dacarbazine and in 27.5% of patients receiving placebo plus dacarbazine (P<0.001).


Robert, C. et al. Ipilimumab plus dacarbazine for previously untreated metastatic melanoma. N Engl J Med 364, 2517–2526 (2011).

이 논문은 Ipilimumab과 decarbazine의 혼합요법이 metastatic melanoma 환자들 502명에게 미치는 효과를 본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약물에 의한 생존률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약물들의 효과와의 비교이고 (이 경우에는 decarbazine 단독치료), 약물에 의한 부작용 역시 중요하게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리 디자인된 실험의 예인 이 논문은 위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점부터 기술되었고, 이 과정에서 논문에서 주장하고 싶은 부분이 드러난 예이다. 


한 실험이 다른 실험을 결정하는 연구

이 경우는 결과섹션은 반복되는 패턴으로 구성된다. 또한 각각의 패턴은 대게 각각의 단락을 이루게 된다. 즉, 질문 - 실험의 개요 - 결과 - 질문에 대한 대답의 반복되는 구성이다. 흔히 우리가 쓰는 논문이 바로 이런 예이고, 극단적으로 짧게 만들어진 예가 brief definitive report 형식 등으로 이루어진 letter이다. 자,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To compare the proliferation of PMN-MDSCs and M-MDSCs and their immediate precursors in vivo, we injected 5-bromodeoxyuridine (BrdU; thymidine analog incorporated by cycling cells) intraperitoneally into EL-4 tumor-bearing mice and measured its incorporation into M-MDSCs and PMN-MDSCs in BM and spleen cells 5 or 24 h later (Fig. 1d,e). As a control, we measured BrdU incorporation in monocytes and PMNs from naive tumor-free mice. M-MDSCs had a 5–6-fold greater BrdU incorporation than PMN-MDSCs did in BM of EL-4 tumor mice (Fig. 1d). We observed no differences in BrdU uptake between PMN-MDSCs from tumor-bearing mice and PMNs from naive mice; M-MDSCs from tumor-bearing mice incorporated more than twofold more BrdU than monocytes from naive mice did (Fig. 1d). Monocytes and PMNs from spleens of naive mice and PMN-MDSCs from spleens of tumor-bearing mice had similar BrdU uptake, whereas M-MDSCs incorporated 2–3-fold more BrdU (Fig. 1e).

We next investigated GM-CSF–driven expansion of sorted populations of BM PMN-MDSCs and M-MDSCs in vitro, cultured with or without tumor explant supernatants. We evaluated the total number of recovered cells as well as cell proliferation. PMN-MDSCs and PMNs exhibited no proliferative activity and poor survival in culture. Tumor explant supernatants improved survival of PMNs and PMN- MDSCs without an effect on proliferation. In contrast, M-MDSCs proliferated and expanded much better than monocytes or PMN- MDSCs did (Supplementary Fig. 2 and Fig. 1f). However, the ratio between PMN-MDSCs and M-MDSCs remained largely unchanged in the total population of Gr-1+CD11b+ MDSCs in vitro (Fig. 1g). Thus, despite the fact that M-MDSCs and their precursors had a higher proliferation rate than monocytes did, their accumulation in tumor-bearing mice was barely detectable. In contrast, precursors of PMN-MDSCs proliferated at similar rates as the PMNs did but expanded dramatically in tumor-bearing hosts. In addition, PMN-MDSCs represented a large percentage of MDSCs during culture, despite the lack of expansion in vitro and their poor survival, suggesting that the pool of PMN-MDSCs may be replenished from M-MDSCs.


Youn, J.-I. et al. Epigenetic silencing of retinoblastoma gene regulates pathologic differentiation of myeloid cells in cancer. Nat Immunol 14, 211–220 (2013).


이 논문은 전형적으로 한 실험이 다른 실험을 결정하는 연구의 예이다. PMN-MDSCs와 M-MDSC의 proliferation을 비교하기 위해 (질문), BrdU를 EL4 종양 동물모델에 접종한 후 (실험), M-MDSC와 PMN-MDSC의 proliferation을 관찰하고 이를 기술하고 (실험의 결과) 이것이 실험의 결과가 된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질문 (위의 예에서는 두 번 째 단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 우리는 오늘 결과섹션의 첫 발을 내딛었다. 다음 시간에는 결과섹션의 나머지 강조 부분과 그 밖의 고려해야할 사항들에 대해서 알아본 후, 옆 길로 좀 새서 그래프와 통계에 대해서 수박 겉핥기로 알아보도록 하자.

한 두달 쉬었더니만 글이 잘 안써지네욥. 개인적으로 딥따 바쁜 관계로 막 쉬어버렸습니다. 사실 8월 중순까지 미친 듯이 바쁘고 나머지는 좀 한가했었는데, 한가한 김에 통계 공부를 좀 했어요. 사실 제가 통계 이런거에는 영 젬병이라. 사실 우리처럼 실험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한테 필요한 통계는 딱 t-test와 ANOVA 아닌가염? 이따위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지라 ㅎㅎ 여하간 통계 공부를 좀 하면서 야 지금까지 제가 정말 개판으로 통계처리를 해왔었구나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허허허. 이제부터는 다시 정상궤도로 올라와서 2주에 한 번씩 포스팅을 다시 시작합니다. 논문작성법은 올해 내로 끝내야죠.  #근데 실 위쳐3 다깬건 비밀 #GTA5는 예전에 다 깼지 #폴아웃4 나오기만 해봐라 1주일 휴가 써야징 #저는 트리스파입니다 #자연미인이 최고!



오늘은 미국과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면서 목숨 혹은 생명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논하고자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의료 행위 수가가 너무나도 낮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과 비교할 때도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의료비가 저렴하다고 측정되어 있는 유럽보다도 더 낮은 수준인 것이 사실입니다. 

참고로, 저는 미국에서 연구를 주로 하는 의사이기 때문에, 한국의 "의료 행위 수가"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음을 우선 알려 드립니다. 의료 행위 수가는 일반적으로 내과, 외과 등 환자를 직접 대면하고 진료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의사의 치료 행위를 보건복지부에서 책정한 가격을 말합니다. 원가를 정하는 것이 민감하기도 하고 주관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현재 책정된 의료 수가는 병원을 최소한 운영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인 "원가"보다 더 낮게 책정되어 있음이 보건복지부 공식 조사 결과 알려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병원이 병원의 고유 역할인 의료 행위만 해서는 운영 자체가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료 수가와 연계해서, 한 번쯤 고민해볼 문제인 생명의 가격그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팔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목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인 이상 평생 한 번밖에 살 수 없는데, 그 "한 번"밖에 살 수 있는 목숨을 돈과 바꾼다 하면, 바꾼 다음에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그런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럼 과연 그 "목숨"을 치료하는 비용은 싸야 할까요? 비싸야 할까요? 

 

여기에서 바로 "목숨값의 역설"[각주:1]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사망할 가능성이 99%인 질병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치료하지 않으면 거의 다 죽는 셈이죠. 하지만 이 질병을 치료하는 경우에는 사망할 가능성이 10%로 낮아진다고 가정합시다. 10%가 치료 후 죽는다고 해도, 나머지 90%의 사람들에게는 그 "치료"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치료 비용은 목숨을 구했으니, 아주 비싸야 하겠죠. 왜냐하면, 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더는 살 수 없을 테니깐요. 치료를 하는 비용이 억만금이라고 해도, 더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질병을 치료하는 비용이 너무나도 비싸다면, 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로 한정될 것입니다. 죽기는 싫지만, 돈이 없어서, 그 치료를 받을 수가 없는 셈이죠. 치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많아질 수도 있고, 치료 비용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돈의 힘목숨의 힘으로 변하는 순간이죠. 

 

(기형적 수가 리포트 -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 보세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비스"라는 행위의 가격은 경제학적으로, 소비자가 서비스를 받고 나서도 충분한 만족감을 얻었을 때 지불할 의향이 있는 마지노선의 가격을 의미합니다. 즉, 이 돈을 냈을 때, 이만큼은 지불할만하다고 느끼는 가격을 서비스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명품 백이 수백만 원이 넘는다 해도 가격이 내리지 않고, 그 가격을 그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 가격을 주어도 충분한 만족감(비록, 그게 사치라 할지라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가격에 팔리는 것입니다. 강남의 미용실 가격이 높은 것 역시, "그 비용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혹은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가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적어지게 되면, 자연히 그 서비스를 찾지 않게 될 것이고, 자연히 서비스의 가격은 내려갈 가능성이 큽니다. 경제학에서 아주 기본적인 개념인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셈이지요. 

물론 같은 값이라면, 가격이 싸면 더 좋겠지만, 싸지 않아도 사고자 하는 소비자가 많다면 굳이 가격을 내릴 필요가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인 셈이죠. 

그럼, 다시금 "목숨값"이라는 것으로 돌아가 봅시다. 

생명이라는 가치(목숨값)는 실제로, 자신이 존재하는 "선행 조건"이기 때문에, 명품 백 한두 개 정도의 가격으로 책정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닐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없어지니 말이죠. 그러니, 이론적으로는 자신이 지불가능한 여건 안에서는, 모든 서비스나 재화의 가격보다 훨씬 더 높아야 합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치료라는 관점으로 한 번 돌아가 보죠. 어떤 질병에 걸렸을 때, 치료를 받으면 살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면, 누구라도 그 질병에 걸렸을 때, 살 가능성이 가장 큰 치료를 받고자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 치료는, 그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 한정적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수요 역시 많을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 행위는 필연적으로 경제학적인 측면에서는

1) 재화(목숨) 자체가 가지고 있는 희귀성이라는 측면, 2) 수요가 많다는 측면에서 가격이 높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보험에서 가장 많은 돈을 타낼 수 있는 것은 사망했을 때임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죠.

 

미국은 이런 서비스적인 관점으로 의료에 접근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이지요.


내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목숨"을 살려줬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느냐. 이 치료가 없었더라면 너는 더 이상 돈도 벌 수 없고, 아무런 사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데, 왜 돈을 조금 내려 하느냐?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

 

라는 가정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대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가정이 깔렸기 때문에, 치료의 행위 수가는 생명과 직결될수록 높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 셈이죠.

 

하지만 사회적으로 또 한 번 생각해볼 문제는, "비용에 따르는 치료 행위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갈까"입니다. 

수요가 많다는 것은 그 질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격이 높으면,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겠죠. 그리고 생명과 직결될수록 치료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을 살릴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아야, 살아난 사람들을 통해, 사회가 지속해서 발전할 가능성이 크겠죠. 돈 많은 사람만 살아남고, 돈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지 못해서 평생 사회를 바꾸어볼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퇴보될 가능성이 크고, 이것이 잠재적으로 가지는 사회 불안 요소 자체도 클 겁니다. 

따라서,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 행위의 가격이 낮을수록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가능성이 크기에, 가장 비싸야 할 목숨값과는 별개로, 치료 가격이 낮아야만 하는 역설적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물론, 이 가격이 무한정 낮게 되면, 의사도 사람인지라 근로 의욕 상실과 의료 질의 하향 평준화가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고하실 분은 오지의 마법사가 쓴(의사들이 많으면 진료받는 환자 입장이 좋아질까?)을 읽어보세요. 

미국은, 사실상, 양자를 교묘하게 잘 섞어 놓은 케이스입니다. 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의료 수가 자체를 높이 책정해 놓고, 그 비용을 의료 보험이라는 테두리로 둘러싸서, 기업과 혜택을 보는 사람들에게 적절히 나누어서 부담시키게 합니다[각주:2].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사실 중 하나가 미국의 의료보험이 비싸다는 것인데, 실제 비싸기는 하지만, 그 사람을 고용한 기업이 상당 부분을 내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부담이 적게 느껴집니다. 즉, 의료 보험 가격이 한국보다 높게 책정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직장이 있거나, 학교에 소속되어 있거나, 어디 집단에 소속되어 고용되어 있으면, 체감하는 의료 보험료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결코 높은 것은 아닙니다[각주:3]. 직장이 없거나, 자영업 등을 하는 사람들은 소속 집단이 없어서, 의료비가 높은 것은 사실이긴 합니다만, 제 주변을 보아도, 직장이 있음에도 의료비가 걱정되어서 병원을 못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높은 의료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직장이나 기업 입장 높은 의료 보험료를 부담하고 있는 셈인 것이죠. 

 

(출산 과정.. 출산은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데, 비용이 높아야 하나요? 낮아야 하나요?)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생명과 연관된 치료비용, 즉, "목숨값"의 수가 자체는 싸게 책정된 셈입니다. 생명과 직결된 암을 치료받는 것이, 쌍꺼풀 수술받는 것보다 더 저렴한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출산하는 비용이 동물병원에서 애완견 출산하는 비용보다 더 싸게 되어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수가가 낮으면 낮은 만큼 서비스의 퀄리티가 낮으냐? 다행히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실제로 미국에 와서 느끼는 한국의 의료 수준은 치료에 한해서 볼 때미국과 대등하다고 봅니다. (안타깝게도 연구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특히, 경험적 치료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한국이 훨씬 더 높다고 느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여담이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뒷돈(?)이라는 도구로, 실력 좋은 의사에게는 비싼 비용으로, 실력이 없는 의사에게는 싼 비용으로 진료를 볼 수 있는 이상한 자본주의 시스템이 있다 보니, 돈 많은 사람은 돈 많은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삽니다. 사회주의라 할 지라도, 의료 자체는 비공식적으로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시장친화적(?)인 자본주의 형태를 보입니다. 

 

의료사회적 보장 체제로 보는 나라들은 대부분 의료 비용이 저렴하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유럽의 대부분 나라가 그렇죠.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유럽의 의대 교육은 국가가 책임을 지는 공적 제도라는 것이죠. 마치 우리나라의 육군사관학교나 경찰대처럼 말이죠. 자기 돈을 내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인재를 키운다는 개념으로 의대 교육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유럽의 경우에는, 의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면, 국가가 요구하는 사회적 보장 체계를 따를 필요가 있고, 그에 따르는 의무도 있습니다. 당연히, 의사의 신분 역시 군인과 같은 공무원 신분입니다. 칼퇴근이 가능하고, 필수적인 일만 합니다. 더 일해도 소득이 증대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저렴"한 치료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자 하죠.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의대 입학 전에 알고 들어갑니다. 

 

그에 반해, 미국은 의대 교육 자체가 사교육이고, 의사를 자영업자근로자로 보는 개념이 강합니다. 네가 돈을 내고 교육받았으니, 네가 돈을 버는 것 역시 네 뜻대로 하여라. 보험회사와 컨택을 해서 정해진 수가를 받든 지, 따로 더 높은 수가를 받든 지 국가가 상관하지는 않겠다는 식입니다. 따라서, 의사 사회에서도 실력에 따라 받는 수가가 다르고, 보험회사 역시 경쟁을 통해서 우수 의사를 영입하고, 반대로, 환자들을 모집하기 위해서 엄청난 경쟁을 합니다. 다만, 보험료 자체가 상대적으로 비싸죠. 여기서 또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모든 것을 의대 입학 전에 알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의대 교육 자체는 미국과 같은 사교육인데, 사회적 의료 시스템 자체는 국가가 컨트롤하는 시스템입니다. 완벽한 유럽 시스템은 아니지만, 국가가 국민 의료 보험을 컨트롤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의 통제권을 국가가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자기 돈을 내면서 의대를 다니지만, 의대를 졸업하고 나서는 국가가 보장하는 돈(수가)만 바라보는 공무원 아닌 공무원이 되는 셈입니다. 물론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고 대부분의 의사가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모든 것을 의대 입학 전에 잘 모르고 들어간다"라는 사실입니다. 

 

의사 혹은 병원을 사업자로 봐야 하느냐, 사회 보장 시스템의 일부로 봐야 하느냐는 보건 의료에서 아주 큰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각각의 단체에서 유리한 대로 사안을 해석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이 되면 추후에 언급하도록 하죠. 

 

목숨 자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으로 따졌을 때는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일수록 가격이 높아져야 합니다. 사망 보험금을 생각해 보세요. 


"목숨값의 역설"은 생명과 연계된 질환을 치료하는 비용이 적었을 때, 사회적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에,[각주:4] 생명과 직결될수록 치료 비용 자체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아주 합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볼 수 있으니깐요.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는 "서비스 제공자인 의료 기관이나, 병원이 만족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의사의 평균 소득이 일반인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높긴 하지만, 의사들도 장사를 하거나, 일을 하는 모든 시민들처럼, 안전하고 행복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가장입니다. 즉, 대부분의 의사는 수전노처럼 돈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는 것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바라는 아버지이자 어머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소득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효율적으로 돈을 벌고자 할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살아야 한다는 자본주의 "시민"이라는 큰 명제를 가진 의사의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소득이 낮아지는 치료 행위는 잘 안 하려고 하겠죠. 즉,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의 대가가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살 정도도 안 되는 경우라면, 그 의료 행위를 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죠. 처음에는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사명감에 그 길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누군가를 돕다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돕는 의료 행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즉, (환자 혹은 소비자들은) 의사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까닭에, 역설적으로 목숨값(의료 수가)이 저렴하면 저렴할수록, 당장은 그렇지 않겠지만,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 행위의 공급은 점차적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리고 그 서비스의 질 역시 점차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현실적으로 이 부분은 새내기 의사들의 전공 선택(인기과, 비인기과)으로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이제는 국가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너무나도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평생 운동만 하고 살아온 프로 선수가 FA에서 "진정성을 보았다"라고 하는 것은 딱 깨 놓고 해석한다면, "돈도 괜찮았고(선행 조건), 대우도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평생을 진료 보면서 살아갈 의사가 특정 과를 선택하는 것은 돈도 좋고, 대우도 좋고, 자신의 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과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특정과, 인기과가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 과라고 해서, 그 부분을 "사명감이 없다,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망각했다, 돈만 밝힌다"는 등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회 구조적인 프레임 안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지향하는 존재이니깐요.

 추가로 설명하자면, 현재 대부분의 인기과는 금전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생명을 다루는 응급이 없기 때문에, 의료 소송이라는 측면에서 더 안전하기까지 합니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 100명에게 현재 직장보다 한 달에 500만 원 정도 더 주는데도, 주말이나 밤에 특근이나 야근을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을 주겠다고 하면, 적어도 99명 모두 직장을 바꿀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과연 이 질문에 "그래도 나는 안 바꾼다"고 대답하실 정도로 자유로우신가요? 저는 솔직히 말해서, 이 질문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현재 나타나는 의료 현상은, 결코 단시일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국민과 정부의 인식 변화, 그리고 의사의 수급 조절, 진료 과별로 얽혀 있는 실타래 등 풀어야 하는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딱히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 또한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세대 간, 계층 간, 그리고 정부와 의료인 간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논의해야 할 사안인 것만큼은 사실입니다.[각주:5]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생명을 살리는 치료일수록 값을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끔, 수가 자체를 낮게 책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없다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생명을 치료해주었으니, 비싼 값을 받아야 할까요? 


저는 오늘도 따끈따끈한 베스트 셀러를 사기 위해서 amazon.com에 들러서 책을 사고, 아이들을 위해서 월마트에 들러서 두 손 가득 장난감 레고를 삽니다. 여자들은 조금 더 예뻐지기 위해서 브랜드 화장품을 사고, 남자들이 조금 더 깔끔해 보이기 위해 삼중 날 면도기를 고르는 것은 일상적입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살 때, 가격에 대한 고민을 대부분 합니다. 비싸니깐 나중에 살까? 비싸니깐 필요 없어. 싸니깐 사자. 등등..하지만, 이런 재화들은 따지고 보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1. " 목숨값의 역설"이라는 용어가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 용어는 제가 글을 쓰기 위해서 만든 용어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목숨값의 역설"은 "생명과 직결될 수록 치료 비용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라는 정의를 따릅니다. 2014.1.29 [본문으로]
  2. 기본적으로 기업이나 고용주가 훨씬 더 많이 냅니다. [본문으로]
  3. 참고로, 저의 경우에는 한달에 보험료로 10불(만원) 정도 냅니다 [본문으로]
  4. 사회적 비용이 줄어든다는 연구 보고는 없습니다. 다만,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당장 의료비가 싸면, 정치인의 인기는 높아지는 것을 보면, 단기적으로는 비용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으로]
  5.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미국에서 연구를 주로 하는 의사이기 때문에, 한국의 "의료 행위 수가"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본문으로]

인류 사회에는 언제 어디서나 ‘일부일처제가 옳으냐, 일부다처제를 허용해야 하느냐, 일처다부제는 왜 안 되냐’는 등등의 인간의 짝짓기 제도에 관한 수많은 의견들이 있어왔다. 현대 사회에서는 고대로부터 전 세계에 각지에 걸쳐 존재했던 일부다처제가 그 설 자리를 잃었고, 일부일처제를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보편타당한 제도로 인정하고 있다. 누군가가 일부다처를 주장했다가는 미개인 혹은 남성우월주의자로 낙인찍히기 딱 좋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동거인 남성과 피아니스트 둘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세 명이서 사이좋게 연애를 하게 되는 아주 독특한 형태의 짝짓기 방식이 연출이 되는데, 이 상황을 극대화하고 정형화한다면 ‘일처다부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다처제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일반적인 폴리아모리의 형태이지만, 일처다부제가 보고된 곳은 티벳의 일부 지역밖에 없다. 이 지역은 유목 사회의 특징 때문에 일처다부제를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당위성이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형제들이 한 여자를 공유). 우선,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 일부일처제의 장단과 현실성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짝짓기 행동에 대한 보편적 특징을 알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므로 한번 정리를 하도록 하자.


첫째, 여성들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사회에서조차도 공통적으로 일부일처제 결혼을 추구한다.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여성들은 신중하게 남자를 선택하고자 하며, 그러고 나서 남자의 가치가 존재하는 한 일생 동안 한 남자를 독점하고, 아이를 기르는 데 그 남자의 도움을 받고, 십중팔구는 죽을 때도 함께 죽기를 원한다.

둘째, 여성들은 본질적으로 성관계의 다양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이나 현실의 여성들은 전혀 색광증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며 끊임없이 주장을 하며, 우리가 그 말을 믿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의 하룻밤 정사에 흥미가 있는 요부는 남성들의 포르노그라피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남자 동성연애자 즉, 게이의 경우 일생동안 보통 100명에서 1,000명의 파트너와 성관계를 맺지만 여성의 경우(레즈비언)는 5명 내외로 제한된다. 남성과 여성의 성적 행동 추구는 근본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남자들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 안에서 한 여자와의 삶을 강요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전 세계 수많은 여자들과 섹스를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리는 게 개체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수컷이 지니는 성관계의 다양성의 추구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반면 여성의 경우 여러 남자와 무분별하게 섹스를 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 별로 없는데,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자식의 숫자가 임신 횟수의 제한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수컷의 도움 없이 자식을 홀로 키워야할 위험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적 기회주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보다는 자신을 보호해주고 자녀를 함께 키워줄 성실한 수컷을 골라서 안정된 성관계를 가지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도 가끔 부정을 저지른다. 모든 불륜이 남성들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남창이나 낯선 사람과의 일시적인 성교에 관심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하더라도, 일일연속극 같은 생활에서 그녀가 그 시기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여성은 아는 남성과의 불륜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모순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원인으로는 불륜남의 강한 유혹, 불행한 결혼 생활, 생물학적 측면에서의 성교 계획 변경 등을 들 수 있으나 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자, 이제는 인간 세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성생활과 유인원과의 성생활을 비교해보자. 영국의 생물학자 로저 쇼트의 1970년대 연구는 매우 쇼킹하고 의미가 있다. 그는 유인원의 해부학적 구조에서 독특한 점을 발견하였는데 침팬지는 거대한 정소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고릴라는 매우 작은 정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릴라는 침팬지보다 몸무게가 4배나 더 무겁지만, 정소는 침팬지가 고릴라보다 4배나 더 무겁다. 쇼트는 이 사실에 의문을 품었고 그것이 교미 체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제안을 했다. 쇼트의 제안에 의하면, 수컷의 정소가 크면 클수록 암컷은 더 일처다부성을 띄게 된다.

그 이유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만약 암컷이 서너 마리의 수컷과 교미를 하게 되면, 각 수컷의 정자들은 암컷의 난자에 가장 먼저 도달하려고 경쟁할 것이다. 수컷이 이 경주에서 자기가 우세하게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더욱 많은 정자를 생산해서 경쟁을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침팬지는 서너 마리의 수컷이 암컷 한 마리를 공유하는 집단을 이루고 살기 때문에, 자주 사정하고 많이 사정할 수 있는 능력에는 포상이 따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수컷이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이 추측은 모든 원숭이와 설치류에 해당한다. 고릴라처럼 성교의 독점을 확신하면 할수록 수컷의 정소는 작아진다. 즉, 암컷이 여러 마리의 수컷과 난교를 이루는 무리에서 살수록 수컷의 정소는 더 커진다.

수컷의 정소가 크면 암컷은 일처다부성이다’라는 쇼트의 주장은 동물의 교미 체계에 대한 해부학적 실마리를 잡은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유인원인 사람의 정소는 중간 크기로, 고릴라의 정소보다는 상당히 큰 편이다. 침팬지의 정소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소는 이미 만들어진 정자를 서늘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정자의 저장 수명을 늘릴 수 있도록 몸 바깥으로 늘어져 있는 음낭 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정자 경쟁의 증거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정소는 침팬지의 정소만큼 크지 않으며, 예전처럼 전력을 다해 작동하고 있지도 않다는 몇 가지 잠정적인 증거가 있다 (한때 인류의 정소는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무게 1그램당 정자의 생산율을 보면, 인간은 현저하게 낮다. 무엇보다 여성은 성적인 면에서 그렇게 문란하지 않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해보이며, 그것은 또 진화학자들이 기대했던 바이기도 하다.

아무리 일부다처제가 강한 사회라도 아내 집단이 한 남성에게서 다른 남성으로 넘겨지는 식으로 조직된 곳은 없다. 인간 사회의 아내 집단은 한 명씩 들어와 형성된 것이므로, 일부다처제를 장려하는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남성은 한 명의 아내와 관계를 유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리섹스 공동체를 만들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각각의 남성들이 각각의 여성들과 짧은 성관계를 반복하는 그런 사회는 만들어진 적도 없고 유지된 적도 없다.

사실 인간의 짝짓기 체계도 유인원 못지않게 특징적이다. 부부간 결속이 오래 유지되고, 일부일처제 중심이지만 때로 일부다처제가 혼재하는 양상, 침팬지처럼 대규모 무리나 부족에 포함되는 것 등이 그 특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성들 사이에 고환의 크기가 아무리 다양할 지라도 고환이 체중에 비례해서 고릴라처럼 작거나 침팬지처럼 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체중에 비례하여 인간의 고환은 고릴라의 다섯 배 정도이고 침팬지의 3분의 1 수준이다. 이것은 여성의 정절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일부일처제의 종에게 적합하다.

다시 글루미 선데이의 다자 연애로 돌아가 보자.

영화에서 여 주인공은 유태인 식당 주인과 4년간의 동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쟁자인 피아니스트가 등장을 한다. 마음씨 좋은 유태인 식당 주인은 그녀가 본인과 피아니스트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주는데 여 주인공은 피아니스트에게 가게 된다.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유태인 식당 주인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 구애를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그냥 사이좋게 세명이서 사귀자고 제안을 하게 되고 이게 받아들여지면서 위태로우면서도 낭만적인 떼사랑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폴리아모리가 가능한 것은 이 관계가 단지 ‘연애’의 목적에만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게 만약 결혼의 상태고 자식을 낳아서 길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만약 여 주인공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치자. 그럼 이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가? 남자 둘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아이라고 확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아기가 아빠 수컷으로부터의 든든하고 지속적인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수컷은 자신이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에 자식의 유전자가 자신의 것임을 확신하기 위하여 암컷을 구속하는 행동을 한다. 그것이 결혼이다. 일반적으로 수컷의 질투가 암컷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집요한데, 이는 원칙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수컷은 새끼가 자신의 유전자를 상속하였다는 확신이 없거나, 남의 자식이 확실한 경우 물질적, 정서적 지원을 전혀 하지 않게 된다. 원시 부족의 상당수에서는 그 사회 내에서 재혼을 할 때는 여자에게 자식들을 죽이고 새 시집을 오게 하는 규칙이 존재한다. 일처다부제가 존재할 수 있는 경우는 티벳처럼 2~3명의 형제(근연도 50%)가 한 여성을 공유하고, 자신 집안의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글루미 선데이에서 나오는 폴리아모리가 일생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식의 형태로 성생활을 하며 살기에는 암컷들의 유전자는 너무 보수적이며, 수컷들의 유전자는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붉은 여왕 (매트 리들리 저) -진화심리학 (데이비드 버스 저) -본성과 양육 (매트 리들리 저)


대선에 나온 강지원 후보자의 부인이라기 보다는 김영란 전 권익 위원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영란 위원장을 잘 표현한 이야기는 바로 이 것이다.

선거의 공정성을 위해서 남편이 대선 출마를 하자마자,

권익위원장 자리를 사임한 사람.


사표가 수리되기 전까지는 공직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 선거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


김영란. 이 사람을 본다면, 원칙이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사람 같다.

특히, 2012년 8월 16일 입법 예고한 부정청탁 금지 및 이해충돌 방지 법안(소위 말하는 김영란 법)을 발의한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잠시 이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대가성"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항상 뇌물 비슷한 것(향응이나, 소위 말하는 용돈, 차도 포함)을 받은 공직자들이 "대가성"이 없다면서 대가성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돈은 돈대로 받을 수 있지만, 대가성이 없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

얼핏 본다면, 한편으로 말이 되긴 된다.

준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당신이 좋아서 돈을 선물했으니깐, 그냥 받아서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쓰세요. 부담은 가지실 필요가 전혀 없어요"

받는 사람 입장에서

"아이쿠~ 이 사람이 나를 무지하게 좋아하는 구만 ^^ 돈은 사실 도움은 되니깐, 받아 두지 모. 내가 공직자라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돈을 주는 거니깐..일이랑은 큰 상관이 없을 테니깐..."

라고 순진하게(?) 생각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다.

세상에 대가 없는 돈은 없으며,

일방적으로 주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밖에 없다고..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돈이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고급 물품이라면, 그냥 주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리고 돈이 많고 성공해서, 그런 것을 주는 사람일수록, "그런 것"이 가지는 의미를 더 잘 안다. 지금 당장은 효과를 거두지 못할지라도 "언젠가는 뿌린 것을 거둘 수 있다는 것" 쯤은, 그 성공을 위해 달려온 시간동안 축적된 경험의 단편일 뿐일 것이다.

기존에 있었던 공직자 윤리법에서는 대가성이 없는 선물은 받아도 되는 것처럼 , 추상적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해 두었다. 일종의 윤리 강령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

윤리 강령으로 된 그것을 조금 더 명확히 하자는 것이 바로 김영란 법의 핵심이다.
(국회에서 계류되고 넘어가는 동안, 여러가지가 바뀌긴 했지만..)

공직자가 된 이상, 그 개인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며, 대가가 있든 없든 공직자가 금품을 받으면 처벌 가능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어찌 보면 씁쓸하기도 하다. 공직자가 "청렴결백"해야 한다는 것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강조된 것인데, 그 것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 씁쓸하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금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청렴함을 무조건 전제하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그 공직이라는 자리가 줄 수 있는 "함정"을 제도로서 보완하고 청렴한 시스템[각주:1]을 마련하는 것 역시 점차 복잡하고 다양한 개인들이 등장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1.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그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법률이 널리 퍼져서, 다시금 윤리의식이 회복되면 좋겠다. [본문으로]

과학자들은 다양한 동기로부터 연구를 시작한다. 그것은 학문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가장 이상적인 사례다!), 졸업, 승진/취업, 또는 연구비 수주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그냥 해야 되나보다 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봤다. 이렇게 다양한 동기로 시작된 연구의 끝은 하나로 수렴한다. 논문 출판. 자기가 얻은 결과를 정리하여  자신의 언어를 통해 다른 연구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줌'으로써 끝나는 것이다연구를 '계획'하고, 이론 작업이나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얻고', 이를 해석하여 '새로운 지식' 을 얻는 과학적인 활동은 일면 격식을 차린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문적 성과는 최종적으로 논문으로 정리된다. 따라서 '훌륭한' 과학자는 '효과적인 논문 작성' 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진행한다. 훌륭한 과학자는 결국 효과적인 글쟁이다.

(출처 - 링크)

논문을 통해서 전파되는 '새로운 지식 발견'의 영광은, 논문을 작성한 '저자'에게 돌아간다. 특히나 저자가 많은 '의생명과학' 논문들의 credit은 제1저자 (first author), 마지막 저자 (last author), 그리고 책임저자 (corresponding author) 가져가는 일이 많다. 보통은 마지막 저자가 책임저자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 저자가 그 연구의 전체 책임자이다. 제1저자는 보통 그 연구 자체를 일선에서 직접 수행한 박사과정 학생이나 박사후 연구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중간 저자는 제1저자와 마지막 저자가 아닌 저자들이다.

우리의 비극은 한 연구의 수확이 '논문의 특정 저자'에게 불균등하게 돌아가는 데에서 시작한다. 한 연구를 마치는 데 참여한 개개인 과학자의 공헌을 수치화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동연구가 더 많아지고 있는 최근 연구에서는, 심지어 저자들 사이에서도 누구의 기여도가 더 큰지 알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논문을 읽는 독자들은 수 많은 저자들 중 누가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알 방법이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사람들에게는 앞뒤 다 자르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만 남아있기가 쉽다. "A 교수" 그룹에 있는 "B" 연구자가 "C"를 발견했대. 다시, "A"는 마지막 저자나 책임저 자일 가능성이 높고, "B"는 제1저자이다. 졸업/승진/취업/연구비수주 등 논문으로 파생되는 다양한 과실을 얻기 위하여 현대의 과학자는 논문의 "중요한 저자"가 되어야만 한다. 연구를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논문의 제1저자나 교신저자가 되는 순간, 그 연구의 영광을 대부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학계의 일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문의 '저자됨 (authorship)'을 가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본다.

First authorship이나 corresponding author를 놓고 공동 연구자들 끼리 또는 심지어 같은 실험실 안에서도 science와는 거리가 먼 눈치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주 드물지 않게 공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명예 저자'가 되는가 하면,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불합리하게 저자 목록에서 빠질 수도 있다 (유령 저자). 자신이 기여한만큼 좋은 authorship을 갖지 못했다는, 교수님이 내 연구성과를 논문이 간절히 필요한 (졸업 등을 위하여) 누구에게 주어버렸다는 볼멘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좋은 authorship을 향한 경쟁은 현대를 살아가는 과학자들에게 불가피한 것이지만, 의외로 이를 명확히 정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은 없다. 그리고 소위 'MD lab'에서 일어난다는 많은 분쟁(?)들도 기원을 찾아들어가면 'authorship' 인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직 연구 책임자 급도 아닐 뿐더러 학위과정 초기부터 시작해도 아직 채 10년이 되지 않은 초짜 과학자일 뿐이지만 (그래서 authorship을 정할 위치는 아니지만...) authorship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은 가지고 있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authorship을 어떻게 정하느냐는 현실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활발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최종 authorship 결정 권한은 연구 책임자에게 있다.

모든 저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결정은 연구 책임자가 내린다. 이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만약 연구 책임자가 공정하지 못한 사람일 경우, 열심히(!) 연구한 사람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이나 연구원은 본인이 아무리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도 현실적으로 그 결정에 반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를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그 연구실에 합류하기 전, 지금까지 쭉 그 실험실의 authorship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publication들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실험실 사람들과 인터뷰하면서 그 실험실의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공정하지 못한 실험실이라고 판단되고 자신이 authorship에 민감할 경우 그 실험실에 합류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런 것도 알아보지 않고 덜컥(!)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은 조금 어리석은 일이다.

2) First author는 논문 draft를 직접 작성해야 한다. 

"논문"의 "제1" 저자이다. 첫번째 저자가 논문을 직접 작성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이상하다. 개인적으로는 실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것 만큼 '논문'을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논문을 직접 쓴 사람은 그 연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어떤 display item (figure/table)을 어떤 위치에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어떤 story를 만들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한데 녹여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이것은 실험을 직접 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고 고통스런 작업이다.

자신이 first author가 될 정도로 이 연구를 이끌어왔다고 생각한다면, 논문을 쓰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Draft를 쓰지 않았다면 first author가 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난 크게 이상할 게 없다고 본다. 연구 책임자의 스타일상 책임자가 직접 논문을 쓴다면, 적어도 main table 과 figure들은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도 논문의 draft를 직접 쓰는데 참여하도록 지속적으로 시도하여야 한다. 

3) 책임저자 그리고 마지막 저자.

사실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저자는 그 연구그룹에서 가장 senior로서 연구를 주도하였거나, 가장 큰 연구비를 마련한 사람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본다. 두 세 연구팀이 공동 연구를 하였다면, 공동 연구팀의 책임자들이 책임저자를 공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드문 경우로 그 연구가 책임senior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실질적으로 주도되었다면, 마지막 저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책임저자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4) 중간 저자

어려운 문제이지만 연구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한 사람이면 저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지식'생산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예를 들면 중요한 샘플을 제공하였다든가 의뢰를 받고 단순 실험을 한 경우에도 실질적으로 이들이 도움이 없다면 연구를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원할 경우 중간 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느 선까지 저자가 될 수 있느냐는 연구 책임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 사람의 과학적인 성과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혹시 논문 한 두 편 정도야 우연히 좋은 저자가 될 수도, 반대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그 사람이 출판한 논문들을 모아놓고 보면 그 사람이 '평균적으로' 어떤 과학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따라서 authorship이 공정하게 정해진다는 '신뢰'가 있고 호흡을 길게 가져갈 수 있으며, 그 사람의 가치를 논문에 적인 저자 리스트가 아니라 실제 능력으로 결정하는 환경에서는 논문 한두편의 authorship에 크게 민감해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졸업/승진/취업/연구비 수주에 논문 편수와 impact factor, 그리고 authorship이 매우 중요한 것이 우리 현실이라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정답은 없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잘못된 환경들을 바꾸어 가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공정치 못한 연구 환경에서 authorship을 얻기 위해 분산되는 그 시간과 노력만큼 우리의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science를 바로 앞에 두고!


정신과 DSM 진단 체계의 그 업데이트 성패여부는 어떻게 하면 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들을 일정한 바운더리의 진단 카테고리 안에 예쁘게 잘 묶어주느냐에 달려있다. 이러한 시도는 치료자들이 진단을 내리고 그에 따른 치료를 용이하게 하도록 도와주기 위함인데, 때때로 인격장애 환자들은 그런 카테고리로 묶어 자신을 진단하거나 재단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와 같은 방식이 최선일 수 밖에 없는게, 정신과에서 피검사나 유전자 검사 혹은 영상의학적 검사로 진단을 내리는 방법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며칠전부터 회자되기 시작한 하버드, 스탠포드 동시 합격의 김모양의 케이스는 그런 면에서 정신과 의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왜냐하면 DSM 체계 내에서 바로 떠오르는 병명을 찾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주위의 정신과 의사 5~6명과 그녀에 대해 잠시 토론을 해보았지만, 딱 이 병이다라고 자신있게 진단 내리는 분은 아무도 없었다. 망상 장애, 인격 장애 등 몇몇 병명들이 나왔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런 병들의 성격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서 성급하게 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녀에 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관련 글들을 기사별로, 블로거별로 여럿 읽다보니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The talented Mr. Ripley"라는 미국의 소설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호텔 종업원으로 일하던 톰 리플리가 재벌의 아들인 친구 디키 그린리프를 죽이고서, 죽은 친구로 신분을 속여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범죄소설이다. 거짓을 감추기 위한 대담한 거짓말과 행동으로 리플리의 행동은 완전범죄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죽은 그린리프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진실이 드러난다. (출처 두산백과)


타인을 속이는 정신의 상태가 topographical한 측면에서 의식의 수준이라면 "Catch me if you can"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정도가 될 것이고, 좀 더 무의식 상태에서 이루어진 사기라면 거의 망상에 "가깝고" 이는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확고한 망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리플리 증후군에서 가장 특징되는 정신 병리는 pseudologia phantastica(공상허언증)인데, 자신의 거짓말을 자신이 믿어버리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 병리가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질환은 소위 꾀병이라고 불리는 Munchausen syndrome이다. 이 질환의 환자는 오직 sick role을 하기 위해 병을 만들어 내며, 2ndary gain이 없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리플리 증후군에 있어서는 그 거짓 믿음의 목표가 sick role이 아니라 인정과 동경을 받고자 하는데에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리플리 증후군은 정신과 의사들 보다는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인 이다해 씨가 리플리 증후군에 있어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연기했다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일본의 술집 접대부였던 여 주인공이 동경대 출신으로 학벌을 속이고,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는 등 자기 자신을 허위로 포장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유명한 실례로는 신정아를 들 수 있겠다.


정신과 진단명으로는 망상 장애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망상 장애와 차이점을 꼽아 보자면 우선, 망상의 목적성 유무이다. 일반 망상장애 환자들은 망상에 뚜렷한 목적이 없으나, 리플리 증후군의 경우는 자기 자신을 포장하고 그로인해 주위로 부터 인정과 동경을 받고자하는 목적이 뚜렷하다. 둘째, 일반 망상장애 환자는 망상의 단서가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리플리 증후군의 경우는 스스로 학력을 위조한다든지 수상 경력을 만들어 낸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그 단서들을 만들어 낸다. 셋째, 앞서 지적한 거짓 믿음의 수준이 의식의 레벨인가 무의식의 레벨인가이다. 망상장애의 환자는 완전한 무의식의 레벨인데, 리플리 증후군의 경우는 좀 더 의식에 가까운 레벨에서 거짓 믿음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보인다(개인적으로 남을 속이는데 성공한 리플리 증후군을 가진 환자를 한번 상담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런게 극히 드문 케이스라서. 성공한 리플리 케이스라면 이미 왠만한 사람들이 다 알게 되는 유명인사가 되어버리니.). 위 세가지 차이점에서 리플리 증후군은 망상 장애보다는 연극성 인격장애 쪽이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아니, 연극성 인격장애와 망상장애가 합쳐진 '창의적 망상장애(creative delusional disorder)'라 부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망상 장애와 의도적 사기꾼 사이, 그 중간 쯤의 상태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까. 그래서 어떤이는 리플리 증후군 상태의 사람을 비난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동정하기도 한다. 그 경계상에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이와 같은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고, 본인 역시 법적인 문제에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전문가의 적절한 진단 및 직면을 통한 통찰력 함양, 충동성 조절 치료 등이 꼭 필요하다.




미국은 자유로운 나라다. 그리고 자본주의 특히 사람을 고용하고, 유인하는데, 돈이라는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 어느 나라보다 큰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긴다. 실제로 미국에서 많이 행해지는 봉사활동이나 기부금도 얼핏보면 돈이랑 큰 상관없이 자아실현을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자본을 모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의대를 졸업한 남자라면, 현재, 군의관을 의무적으로 3년간 가게 된다. 공보의나 전문 연구요원으로 가는 경우도 물론 없지 않지만(다른 군대에 대한 옵션 글을 보고 싶으신 분은 링크로, 의대생 혹은 의사로 선택할 수 있는 국방의 의무 옵션), 대부분은 군의관을 가는 것이 사실이다. 의전원으로 전환된 시기 동안에는 미리 사병으로 군을 갔다온 사람이 많아서 한동안 군의관 요원이 부족해서 국방의전원을 설립하니 마니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군의관 수급이라는 측면에서 국방의 의무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그에 반해 모든 군의관이 원칙적으로 "고용"된다. 의무감으로 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에 따르는 유인책은 분명히 존재한다. 오늘은 그 유인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미국 의대는 학비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 4년 본과 기간동안 평균적으로 20-25만불 이 학비로 이용되고 거기에 생활비가 더해진다. 대략 의대를 졸업하는데 4억정도 소요된다는 것이 여기 의대생들의 이야기인 것 같다. 사실상 제일 비싼 학비를 내는 동네가 바로 의대인 셈이다. 여하튼, 미국 일반 대학의 학비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의대는 그 어느 동네보다 금액 부담이 많은 것 같고, 학생들을 돈으로 무언가 꼬시기 쉬운 동네인 것은 사실이다. 장학금으로 괜찮은 학생을 꼬시는 것(?)부터 시작해서...군대 조차도 돈으로 꼬신다.


물론, 졸업하고 나서 그에 상응하는 리턴을 받는 것 또한 사실이니, 들어가는 것이 어디냐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등록금을 먼저 학교에 내고 다니는 것과는 달리(실제로 우리 나라도 학자금 대출이 있기는 하다만), 미국에서는 의대를 다니는 동안 학비는 대부분 학자금 대출을 이용한다.


일부 장학금을 받거나 외부 펀드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자가 싼 학자금 대출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한다. 그리고 학부과정도 그렇게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사실상 의대를 졸업하고  강남 아파트 전세금(6-8억정도)을 빚으로 안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셈이다. 학생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실을 아는 미국 군대 또한 가만히 있을리 없다.



돈으로 살살 의대생들을 유인(?)(이라고 쓰고 꼬신다 라고 말한다)한다.


일단, 의대에 들어와서 1학년 때 혹은 그 이전에 지원을 하면, 학비와 생활비가 지원된다. 계급은 second lieutenant으로 시작한다. 의대 다니는 동안에는 우리의 ROTC 처럼 1년 동안 6주 군 훈련을 받으러 가면 된다. 그 외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



이미지에서 나오듯이, 광고 한 번 정말 멋지게 잘 만들었다. ^^ 자꾸 읽다 보면 정말 군대에 가고 싶어질 정도다. 어찌나 포장을 잘 하는지. 기본적으로 학비가 면제되고, 생활비로 한달에 2000불(220만원 정도) 주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Captain으로 진급해서 일선에서 의사로 일을 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모든 과정을 설명할 때 돈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학교 다니는 동안 학비로 얼마를 지원해주고, 생활비를 얼마 준다. 그리고 진급하게 되면 얼마를 더 주게 되고, 하나의 자격을 획득하고 근속을 하면 할 수록 돈을 더 준다는 식이다. 거창한 사명감이나, 애국심에는 호소하지 않는다.


물론, 서로 win-win하기 위해서 최신식 군병원에 대한 소개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쓰고 이라고 읽는다)가 주를 이룬다. 우리와는 사뭇다른 모습이다.


실제로, 개인적으로 2명의 전직 미국 군의관을 알고 있다. 한 분은 본과 4학년 때 실습으로 미군부대에 갔을 때 알게 된 분인데, 여자고 흑인이였다. 아직까지도 종종 이메일을 하는데 현재는 Iowa에서 Clinic을 하고 있다. Brown 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이 되었는데, 왜 군의관이 되었냐고 질문은 하니깐, "너무 좋은 scholarship을 받아서"라고 이유를 말해 주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군의관으로 한국에 파병오게 되면 "pay를 조금 더 받는 점"이 한국에 오게 된 계기라고도 이야기 해 주었었다.


자신이 학교 다니는 동안 학비 지원을 받았고, 그에 상응해서 당연히 해야할 일인데, 좋은 기회가 있어서 한국에 왔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같은 사람이 많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러면서 아주 만족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아울러, 전혀 돈에 대한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돈으로 받는 것인데,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고.


또 한 명은 현재 MD anderson에 있는 병리학 의사이다. 암 조직 병리에서 유명한 교수님이신데, 우연히 한국에 오셨을 때, 한국 소개와 관광 통역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는데, 남미 출신이신 분이셨다. 그 당시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군의관을 하면서 병리학 Residency를 하게되어서 현재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당시 군의관을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아주 잘 한 일이였다고 하셨다. 많은 병리 케이스를 접할 수 있었고, 그 바탕으로 아카데믹 연구를 할 수 있었긴 때문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커리어이긴 하지만, 두 명의 전직 군의관과의 대화는 미국의 커리어 유연성을 볼 수 있는 간접적인 경험이 되었었다. 실제로 미국이란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단순히 의사만 고용하는 것이 아니고, 치과의사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다. ^^ 추가로 수의사나, 안경사, 임상 심리사도 medical army team에 지원할 수는 있는 것 같다. scholarship에서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럼, 제일 중요한 duty 혹은 obligation은 어떻게 될까? 의사는 최소 2년이고, 치과를 포함한 다른 과들은 3년인데,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상황마다 조금은 다르지만, 4년을 지원받으면 4년간 복무를 하면 되는데, 만약 레지던트를 하게 되면 그 동안은 duty가 delay이 되지만, 더 늘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인턴을 마치고 와서 복무할 수도 있고, 의대를 졸업하자 마자 복무할 수도 있는데, 대체로 지원받는 기간 만큼 일하면 되는 셈이다. 단, training은 군병원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나라도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사실인데, 국방부에서 홍보도 크게 안하는 것 같고 간다고 하는 사람도 적은 것처럼 보인다. 그냥 학교에 공문 하나만 달랑 보내는 것이 끝. 그에 반해, 여기 미국은 서로가 서로 win-win하고자 하는 느낌이 강하다.(여기 프로그램도 역시 군인은 군인이겠지만) 우리 나라도 장기 복무 과정이 있긴 하던데, 뭔가 문제가 있는 듯 한데…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다. ^^


여담이지만, MDPhD 조차도 돈으로 꼬신다...사실상, 금전적인 이유가 MDPhD 제도의 부흥을 이끌어 내는데 가장 큰 몫을 했다고 보는 시야가 많다. 물론, 1950년대 이후에 있었던 징병 제도 대신 가는 MDPhD는 별개로 해야 하겠지만... 미국에서도 국방의 의무를 대치하는 MDPhD연구원 제도는 아주 큰 성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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