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과생활을 되짚어보는 일은 나에게는 정말 힘들었다. 특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했던 1학년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입학하기 전 나는 의학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떠한 것을 공부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겠다 싶다.) 사돈의 팔촌을 뒤져도 의사나 의료계 근처에서라도 일하는 사람도 없었고, 게다가 나는 문과계열 출신이다 보니 건너건너 아는 친구도 없었다.
(닥터 몽 의대 가다 프로그램 정도 수준만 되어도 본과 1학년 10번은 하겠다.출처 : (C) CJ E&M All rights reserved.)
몇 년 전 케이블 TV에서 지금은 튼튼한 임플란트를 장착하고 두문불출하고 있는 MC몽이 의대생 생활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다. (실제 내가 경험해보니 그것은 실제 체험강도의 한 1/10 정도 되는 듯하다.) 내가 아는 의학도들의 생활은 TV에서 보는 그런 것들이 전부였고, 일반 대학생보다 조금 많이 힘들고 많이 공부해야 하는 학생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한 것 그 이상이 아닌 상상도 못한 생활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얼른 대학생이 되어서 자유를 만끽하고 살아야지.
고등학교 때 수능시험과 내신의 압박을 받으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실제로 대학은 중고생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곳일 수 있다. 우선 성인이 되어 많은 제약이 없어지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업의 압박,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의 압박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시간표도 내 마음대로 짜고, 수업시간도 많지도 않고, 오후 늦게까지 수업들을 일도 별로 없고, 야간 자율학습도 없고, 학교가 끝나면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방학도 길고, 배우고 싶은 다른 것들도 배우고… 이런 것을 상상했다면 실제의 대학생활에서도 가능하다. 물론 학문에 뜻이 있는 자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하루 20시간을 보낼 것이고, 최근 취업 문이 좁아져서 많은 청춘들이 취업준비를 위해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대학생활의 본질은 자율성에 있다.
그러나 당신이 진학한 곳이 의과대학이라면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난다. 의대 본과생활은 당신이 성인이 되었다는 것과 교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고3생활과 다를 것이 없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외워야 할 것, 공부할 것은 더 많아지고, 더 어려워진다. 더불어서 방학도 훨씬 짧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의대 본과 1학년을 상상한다면, 실제 생활은 어떤 것을 상상하든, 상상하는 것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서론은 접어두고 본격적으로 본과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본과 수업은 정해진 학습목표에 근거하여 공통적인 과목들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커리큘럼은 학교마다 다르므로 필자가 다닌 학교만을 기준으로 서술하겠다.
"수강신청 전쟁"은 어느 별 이야기?
의대가 아닌 대학교 학부강의와 가장 큰 차이점은 첫째, 내가 시간표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수업 구성에 있어서 자율성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다!!!!!
보통 학부 수업은 졸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학기 수와(보통 8학기), 학점 수가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시간표를 구성한다.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들은 정해져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흥미 있는 과목 위주로 구성할 수도 있고, 관심도에 따라 특정 계열 수업은 더 듣거나 덜 들을 수도 있으며, 다른 과의 수업을 듣는 것이 가능하다. 나아가서 복수전공과 부전공도 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시간표도 짜기 나름이라 주3파 주4파 하는 식으로 수업이 없는 날을 만들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옵션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학생들이 선호하는 인기강의, 인기교수, 인기강사들도 등장하고 수강신청 전쟁이라는 것이 매 학기 연례행사처럼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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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2013년 SNS에서 인기를 끌었던 수강신청 전쟁 동영상 한장면, 의대생에게는 별나라 이야기이다.>
그러나 의과대학의 본과수업은 이런 면에서의 자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등학교처럼 시간표는 이미 정해져 있고 실습장비가 필요한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 학생들은 그저 강의실에 앉아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시간마다 교수님이 바뀌어서 들어오신다. 말이 강의실이지 교실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개설되는 모든 과목이 전공필수이므로 학생들은 좋든 싫든 모든 과목을 들어야 한다. 강의선택이 불가능하니, 인기강의와 비인기강의도 원칙상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강신청 변경기간이나 수강신청 취소기간 같은 것도 없다 (학교에 따라서 간혹 임상실습 과목 중 일부를 선택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다. ) 완전 중고등학교네?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중고등학교는 그래도 1년마다 반이 바뀌어서 새로운 얼굴들과 수업을 듣고 함께 어울리지만, 본과생활은 졸업할 때까지 반도 안 바뀌고 같은 얼굴들과 계속 수업을 들어야만 한다! 그것도 4년 이상! (신중히 CC를 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매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전공 필수과목이나 인기과목들을 신청하기 위해 캠퍼스마다 벌어지는 수강신청 전쟁 같은 것은 의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각종 노하우와 심지어는 암거래도 오간다는 설이 들리는 수강신청 전쟁, 그것은 어느 별 이야기인가요?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 재수강? No, 유급!
정해진 시간표라는 점 때문에 또 한가지 차이점이 발생하는데 과목 재수강과 유급에 관한 것이다. 의대가 아닌 학부에서는 F가 나온 과목이나, 혹은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싶은 과목이 있으면 다음 학년에서 시간표를 조정해서 그 과목만 재수강을 할 수 있다. 아니면 듣다가 영 아닌 과목은 수강 포기 기간에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고, 필요한 경우 계절학기를 통해 학점을 보충할 수도 있다. 즉, 몇 개의 과목에서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지 못하거나 F를 받았다고 해도 8학기 내에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반대의 경우도 생기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학점을 일찍 채운 경우 7학기, 빠르게는 6학기만에 학부과정을 마치는 조기졸업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대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불가능하다. 학부에서 졸업학기의 변동 없이 재수강과 학점 올리기가 가능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시간표를 학생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4년 8학기 동안 내가 신청할 수 있는 학점이 졸업에 필요한 학점보다 많으므로, 몇 개의 과목을 다시 들어서 일부 학점을 포기해도 필수 학점을 채울 수 있으며, 어느 학년에 무슨 과목을 들어야 한다고 강제하는 것이 일반 대학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대에서는 필요한 필수 학점으로만 수업 시간표가 짜여 있다. (참고로 이것만 하기도 버겁다.) 따라서, 시간표를 한 번 놓쳐버리면, 다시 수업을 들을 기회는 이론적으로 다음해나 가능한데 학년을 진급하면, 그 수업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재수강과는 다른 유급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다.
출처 : 엔하위키미러 유급 관련 정의 클릭!
잘 안 와닿는다면, 고등학교를 생각해보자.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고등학교는 시간표를 학생이 정할 수 없다. 내가 2학년 때 수학 과목의 점수를 60점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내 성적은 종료 된 것이지, 3학년에 올라가서 3학년 수업을 모두 들으면서, 동시간에 진행되는 2학년 수학 수업을 다시 들을 수는 없다. 정 듣고 싶다면 2학년 수학과목 시간에 2학년 교실을 가서 강의를 듣고, 그 시간에 진행되는 3학년 한 과목을 포기해야 한다. 여기서 고등학교라는 단어를 의대 본과로 바꾸면 정답이다. 한마디로 제 때 학교를 다니면서 재수강은 불가능하다. 고등학교처럼 1학년 때만 들어야 하는 과목, 2학년 때만 들어야 하는 과목이 정해져 있고, 시간표는 주5일 빠짐없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받은 성적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때 잘해야 한다. 한 번 흘러간 성적은 다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의대 성적표의 특징이기도 하다.
유급은 다음 학년으로 제 때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의대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 있으신 분들을 링크한 엔하위키에서 '유급'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출석미달로 같은 학년을 다음 해에 또 다니는 학생들을 속된 말로
‘1년 꿇었다’
라고 표현했는데 비슷한 개념이다. 대신 의과대학에서는 출석미달뿐만 아니라 성적미달로 다음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유급이 된다. 내가 다닌 학교의 경우는 해당학기 성적이 평점 4.5만점에 2,0 미만(평락)이거나 한과목이라도 F(과락)를 받은 학생이 유급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그대가 1학년 1학기에 한 과목을 F를 받고, 나머지 과목들을 모두 A를 받았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리 다른 과목들을 잘했어도, F를 받은 그 한 과목 때문에 2학년에 진급하지 못한다. 같이 입학한 동기들이 2학년으로 올라갈 때 그대는 다시 1학년이 되어야만 하고, 결과적으로 학교를 1년 더 다녀야만 한다. (물론 등록금도 다시 내야겠지.) 만일, 그대가 의대 본과생이 아닌 다른 학부생 이었다면 다음해에 2학년에 올라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고 4학년 되기 전까지 아무 학기에나 그 F받은 과목을 다시 재수강하면 될 텐데 말이다.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학교생활은 무관심하고 음주가무에 빠지거나 정말 공부를 못하는 사람만이 유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적이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같이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줄서기처럼 1등부터 꼴찌까지 매겨질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학교마다 매해 유급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이 있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정해진 기준을 그 학기에만 채우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본과 1학년 때 우리 동기들 중에서 약 10%가 2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유급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 모두 대부분의 과목을 B이상의 성적을 받았는데 특정 한 과목만 F를 받아서였다. 그들 모두 결석 없이 매일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리고 해당과목은 늘 10%이상 학생들에게 F를 할당하는 과목이었다. 성적표가 나오자 학년 전체가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그 학생들이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노라고 제발 D-라도 달라고 사정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생은 길기 때문에 1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막상 재학중인 학생들에게는 비싼 등록금을 더 내야 하는 문제 등과 맞물려서 큰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유급 문제이다.
이게 의대생들이 시험에 쪼여가며 빡시게 공부하는 본질적인 이유다. 한 과목이라도 GG치면 1년을 다시해야한다는 부담감.
별나라에서 사는 본과생들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오는 외계인인 도민준(김수현)도 본과 1학년을 유급 걱정하면서 덜덜 떨면서 공부하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의과대학이 다른 과들과 함께 종합대학의 일부로 소속되어 있지만, 이렇게 특징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합동아리 활동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다른 과들과 활발하게 접촉하기도 힘들고, 여러분야의 학문과 활동을 접할 기회도 적다. 좋게 말하면 독립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배타적인 캠퍼스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현재 문제가 되는 의사라는 집단과 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을 가져오는 하나의 요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본과 1학년을 되짚어 본다는 것이 너무 장황한 이야기로 진행됐다. 그저 하고싶은 말은 본과생활은 기본적인 대학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 때문에, 학업 자체뿐만 아니라 외적인 것들까지 여러 가지 힘든 기억이 많은 시절이었다. 보통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그때로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다시 말하지만 본과 1학년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단호하게
“No, thank you.”
되시겠다.
만일 그대의 친구가 현재 의과대학이나 의전원 본과에 재학중이라면? 술 한잔 마시자고 부르는데 안 나온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말자. 그 친구도 나오고 싶어서, 온몸이 들썩거리지만 두꺼운 책과 강의자료에 파묻혀서 다음학년에 무사진급하기 위해 속을 태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의대는 개설된 강의를 모두 들어야 하는 관계로 다른 학부보다 학기는 길고 방학은 짧다. 평균 한달이나 될까? 그나마 그 방학동안 동아리며 봉사활동이며 학과 생활로 치인다. 대학생들의 방학기간에 그 친구는 방학이 아닐 수도 있다!
P.S.
의과대학 본과의 학제 시스템에 대해 예상보다 길게 설명했는데, 그 이유는 얼마 전 이 MDPHD.kr 블로그의 방명록에서 누군가가 의대 진학 후 생물학을 복수전공을 하려고 한다는 글을 봤기 때문이다. 의대의 학제를 일반적인 다른 학부의 학제와 같다고 알고 있었다면 그러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의과대학은 독립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타과 수업을 가서 듣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복수전공까지 하기 위해 다른 학과의 강의를 다량으로 이수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