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고 간 그 담날 저녁 나절이었다. 실험을 잔뜩하고, 연구실로 돌아오려니깐, 어디서 포닥이 죽는 소리를 친다. 어 뉘 실험실에서 포닥을 잡나 하고 점교수네 실험실로 돌아오다가 나는 고만 두 눈이 뚱그래졌다. 점교수가 저희 실험실 봉당에 홀로 걸터앉았는데, 아 이게 실험실 앞 복도에다 우리 포닥을 꼭 붙들어 놓고는 


“이 놈의 포닥. 니 인건비 할 연구비 따와라. 따와라.”


요렇게 암팡스레 혼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에 쌍심지가 오르고 사지가 부르르 떨렸으나, 사방을 한번 휘돌아보고야 그제서 점교수네 실험실에 아무도 없음을 알았다. 잡은 파이펫을 들어 후려치며,


“이 놈의 교수놈. 남의 포닥 논문 못 쓰게 하라구 그러니?” 


하고 소리를 뻑 질렀다. 


그러나 점교수는 조금도 놀래는 기색이 없고, 그대로 의젓이 앉아서 제 포닥 가지고 하듯이 또 연구비 따와라, 따와라 하고 혼내는 것이다. 이걸 보면 내가 실험하고 돌아올 때를 겨냥해 가지고 미리부터 포닥을 잡아 가지고 있다가 너 보란 듯이 내 앞에서 줴지르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남의 실험실에 튀어 들어가 조교수하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형편이 썩 불리함을 알았다. 그래 포닥이 혼날 적마다 파이펫으로 실험노트를 후려칠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아, 점교수! 남의 포닥 아주 죽일 터냐?”


내가 도끼눈을 뜨고 다시 꽥 호령을 하니까, 그제서야 팩스 옆으로 쪼르르 오더니 실험실 밖에 섰는 나의 머리를 겨누고 포닥을 내팽개친다.


“에이 쓸모없다!”


“쓸모없는 걸 널더러 입때 끼고 있으랬니? 망할 조교수 같으니”


하고 나도 실험실을 힝하게 돌아내리며 약이 오를 대로 다 올랐다라고 하는 것은, 포닥이 섬기는 서슬을 본다면 적어도 마음의 스크래치가 단단히 든 듯 싶다.


그리고 나의 등 뒤를 향하여 나에게만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야 이 바보 연구교수 녀석아!”


“얘! 너 배냇병신이지?”


그만도 좋으련만,


“얘! 너, 느 교수님이 논문도 못 냈대지?”


“뭐? 울 교수님이 그래 논문도 못내?”


할 양으로 열벙거지가 나서 고개를 홱 돌리어 바라봤더니, 그 때까지 실험실 밖으로 나와 있어야 할 점교수의 대가리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나 돌아서서 오자면 아까에 한 욕을 실험실 밖으로 또 퍼붓는 것이다.욕을 이토록 먹어 가면서도 대거리 한 마디도 못 하는 걸 생각하니, 지난 달 미국 연구실에서 제의받은 연봉 없는 포닥자리라도 가버릴 껄 하면서, 분하고 급기야는 눈물까지 불끈 내솟는다.


그러나 점교수의 침해는 이것뿐이 아니다.


컬쳐룸에 사람들이 없으면, 틈틈히 제 박사과정 학생을 몰고 와서, 클린벤치를 점령한다. 제 실험실 남자 박사과정 학생은 썩 험상궂게 생기고, 실험이라면 홰를 치는고로, 으레 컬쳐룸에서 며칠이고 실험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툭하면 우리 포닥이 실험할 공간이 없어서, 슬리퍼 신고 책상머리에 앉아 케이온이나 보게 해놓는다. 


이렇게 되면 나도 다른 배차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우리 포닥을 붙들어 가지고 넌지시 회의실로 갔다. 포닥에게 네이처 논문을 읽히면, 해외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외국인 포닥이 컨포칼 결과 하나만 가지고 네이쳐 쓰는 것처럼 논문을 잘 쓴다 한다. 책장에서 네이처 논문을 잔뜩 들고 포닥에게 읽혀 보았다. 포닥도 네이처에 맛을 들였는지 거스르지 않고 거진 반년치 논문을 훌쩍 읽는다. 


그리고 읽고는 금세 실험을 못할 터이므로 얼마쯤 기운이 돌도록 현미경실에다 가두어 두었다. 


웨스턴 한 두 판을 끝내고 나서 쉴 참에 포닥을 데리고 컬쳐룸으로 나왔다. 마침 컬쳐룸에는 아무도 없고, 점교수만 저희 사무실 안에서 연구계획서를 쓰는지 앉아서 노트북을 쳐다볼 뿐이다. 


나는 점교수네 박사과정 학생이 노는 실험테이블로 가서 포닥을 내려놓고 가만히 맥을 보았다. 포닥은 여전히 얼리어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아무 보람이 없다. 점교수네 박사과정 학생이 멋지게 인트로덕션을 쓰는 바람에 우리 포닥은 겨우 저자목록만 쓰면서, 연신 땀만 흘리고 당췌 논문 진도는 나갈 생각을 안 한다.


그러나 한 번은 어쩐 일인지 한글을 열고 마우스도 쓰지 않고 테이블을 척척 만들어 가니, 점순네 박사학생도 여기에는 놀랐는지 뒤로 멀씰한다. 과연 우리 포닥이 과체중 때문에 행정병으로 군대를 다녀온 것이 키보드에서 손도 안 떼고 표를 만드는 것이었다. 


옳다, 알았다. 행정병 출신에 네이쳐만 읽히면 되는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아주 쟁그러워 죽겠다. 그 때에는 연구실 밖으로 내다보고 섰던 점교수도 입맛이 쓴지 살을 찌푸렸다. 


나는 두 손으로 벌기짝을 두드리며 연방


“잘 한다! 잘 한다!”


하고 신이 머리끝까지 뻗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넋이 풀리어 기둥같이 묵묵히 서 있게 되었다. 왜냐 하면 점순네 박사과정이 submission한 논문이 Immunity에 억셉되는 서슬에 우리 포닥은 BBRC에서도 리젝되어 막 곯는다. 이걸 보고는 이번에는 점교수가 깔깔거리고 되도록 이쪽에서 많이 들으라고 웃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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