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말한다.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을 넘어서는 고차원적인 대답을 할 수 있고, 그 문장에서 정확한 정보를 캐치하고, 그에 따른 판단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 외에도 체스, 퀴즈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인공 지능이 개발되고 있고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결국, 궁극적인 인공 지능의 목표는 "사람과 같은 사고를 하고, 사람과 비슷한 대화를 하는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계가 인공 지능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튜링 테스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상황, 뉘앙스에 따라 똑같은 문장이라도 다른 정보를 포함할 수 있다. 예컨대,

 

밥은 먹고 다니냐?

 

라는 문장을 예시로 들어 보자. 질문 자체는 아주 간단하고, "예-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문장이지만, 질문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질문하는 뉘앙스, 사업이 망하고 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고 있는 여자 친구 등 대상에 따라서 각기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이런 은유적 질문, 혹은 상황을 판단해서 던지는 질문에 충분히 적절한 반응을 할 수 있다.


(왓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림 - IBM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컴퓨터의 입장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아주 어려운 상황이 된다.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단순한 말 하나에 대답하기 위해서 컴퓨터는 여러가지 판단을 해야만 답을 할 수 있다.


첫째로는, 이 질문이 진짜 사실을 묻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 은유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과연 그 사람이 어떤 의도로 말을 하는지 유추해야 한다. 뉘앙스를 판단하는 과정이다. 셋째로, 이 질문에 대해서 내가 처한 상황을 적절히 반영하는 "예-아니오"가 아닌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판단 과정이 존재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렇게 컴퓨터가 직접적으로 알아듣기 힘든 대화(코드가 아닌)를 인공 지능에서는 "자연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대화하는 모든 언어는 사실상 자연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매 질문마다, 다양한 판단을 요구하지만, 충분히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는 과정. 이것은 인간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라고 여겨져 왔다. 


이런 상황이 최근 IBM에서 개발한 왓슨에 의해서 깨지고 있다. 참고로, 여기에서 나오는 왓슨은 DNA의 그 왓슨이 아니라 IBM의 창립자 토머스 왓슨이다. 그리고 이제 조만간 왓슨은 인공 지능의 대명사로 그 둘보다 더 유명해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아직까지는 완벽하다고 볼 수 없지만, 적어도, 퀴즈쇼 영역에서 만큼은 그런 일이 벌어졌고,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미국 퀴즈쇼 중에서 아주 유명한 Jeopardy라는 퀴즈쇼가 있는데, 이 퀴즈쇼에서 엄청난 차이로 우승을 한 것이다. (참고하실 분은 아래 동영상을 참고해 보세요. ^^) 사람처럼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는 것은 물론, 은유적인 단어를 포함한 질문에까지 대답을 한다. 물론 영어로 된 표현이긴 하지만, 기존의 컴퓨터로는 단순히 대답하기 힘들었던 자연어를 이해하고, 대답하는 인공 지능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이제 의사의 영역으로 돌아 보자. 사실, 방대한 지식, 그리고 정확한 판단, 시진, 촉진, 청진 등 다양한 감각과 복잡한 정보가 꼬여있는 의료 영역에 인공 지능의 관여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 영역에까지 인공 지능 왓슨이 다가 오고 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실제로 이런 대세를 이제는 거스를 수는 없는 것 같다. 상당한 뉘앙스가 들어 있는 질문까지 대답할 수 있는 인공 지능 컴퓨터. 인공 지능의 "의사 놀이"는 이제 놀이를 넘어서, 진단의 영역까지 들어온 것 같다. 왓슨은 이제, 의료 영역에서

 

"진단을 위해 더 필요한 history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finding을 통해서 어떤 진단을 유추할 수 있는가" 

 

까지 왔다.


이제, 의사의 할 일을 재정의하고, "어떤 방향으로 의사를 교육할 수 있느냐"가 의사라는 "인재 양성"에 새로운 개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컨대, 단순한 의학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 지능에 저장된 정보를 적절한 형태로 응용해서 환자에게 도움을 주는 판단을 내리는 의사의 역할 말이다. 마치 현재 아무도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 번호를 하나하나 외우지 않는 것처럼, 의료 지식 역시 단순한 지식의 저장과 리콜보다 지식의 응용과 판단을 조금 더 강조하는 형태로 말이다.
 

 (의사의 판단에 도움을 주는 인공 지능, 의사라는 직업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형태와 교육은 변할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허준 시대의 의사가 더 이상 외과적 수술을 포함한, 다양한 내과 질환을 치료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의 의사의 개념과는 달리, 현대의 "의사"의 개념은 완벽히 진화되었고, 그 당시와는 다르게 재정의되었다.


이제 의사는 약초를 구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정제된 약을 "적합한 통계와 근거"기반해 효능을 검증하고, 환자에게 처방한다. 그에 따른 교육도 필요에 따라 대치되었고 현재 평균 수명은 그 어느 때보다 높고, 앞으로 더 발전된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비록 시대는 다를지라도, 의사는 의사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다. 그에 발맞추지 못한 의사 집단들은 도태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의사는 직접 X-ray를 찍지 않고, 피를 뽑아 직접 검사하지 않아도 된다. 시진, 문진을 하긴 하겠지만, 결과를 통합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근거한 판단이 의사의 주 역할이 되었다. 이 때, 의사의 역할은 다양한 환자 정보를 통합적으로 판단해서 근거에 기반한 치료를 하는 것이 된 셈이다. 이제 "인공 지능"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단순한 계산을 넘는 이런 통합적 판단도 가능하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UC irvine에서 시도되는 색다른 시도. 이런 변혁과 도전이 가능한 학교가 우리 나라에도 있을까?)


현재, 의료계에서 화두가 될 가능성이 큰 구글 글래스 역시 그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단순히 기록한다는 것을 넘어서, 정보를 저장하고, 인공 지능과 결부되어 정확하고 필요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 궁극적으로 판단은 의사가 하겠지만, 단순히 내가 알고 있는 병의 가능성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인공 지능. 의학에서의 인공 지능의 묘미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인공 지능을 사용하는 모두가 "예외적 질병"을 잘 발견하는 닥터 하우스[각주:1]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예외적 질병"을 잘 발견하는 닥터 하우스)


개인이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방향으로 자신을 계발할 것인지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고 보겠다. 극단적으로 본다면, 저장의 기능을 완전히 인공지능 혹은 기계에 맡기고, 판단을 우선으로 하는 의사. 반대로, 저장의 기능을 충실하게 따라서 환자에게 신속한 진단을 내리는 고전적인 형태의 의사. 어떤 모습이 더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그 나름의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비지니스의 관점에서는 과연 어떤 형태로, 정보를 취득하고, "의사에게 올바른 근거를 어떤 우선순위로 보여줄 것인가"가 인공 지능의 핵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정보가 충분히 있는 어느 순간부터는 "정보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적절히(라고 말하지만 아주 어렵다) 취사 선택한 정보를 제시하는 똑똑한 인공 지능의 개발은 의료의 발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확신한다.


끝으로, 왓슨 개발자 중 하나인 Ken의 TED Seattle에서 강연이다. 충분히 의미 있는 강연이고, 위에 언급한 질문에 대해 많은 insight를 주는 강연인 것 같다. 한 번 살펴 보면서, 미래에 대비하는 것은 어떨까?

 

 


과연 "의사"라는 직업인이 이런 인공 지능과 공존하기 위해서 나아 가야할 방향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때, "준비해야 할 소양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할 타이밍이 온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퀴즈쇼에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멀뚱히 인공지능이 우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도전자 꼴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1. 사실 닥터 하우스는 일반적인 의사의 관점에서는 아주 이상한 의사라고 할 수 있다.most common disease를 항상 rule out하기 때문이다.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경우에 따라서 꼭 좋은 의사는 아닐 수 있다. [본문으로]

일단, 나는 진료를 주로 보는 의사가 아님을 우선 밝힌다. 나는 기초의학을 연구하는 의사로, 의대를 졸업하고, 연구 쪽으로 빠져서 진료와는 약간의 담을 쌓은 사람이다. 내 의대 동기들은 현재 대부분 임상을 하고 있으며, 130명 정도 되는 동기 중에서 유일하게 나 혼자만이 기초의학을 선택했다. 현재는 미국에 와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 100%는 아니지만,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울러, 내 스스로 의사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와 진료를 보는 의사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과학자에 더 가까운 사람으로 나를 평가하고 있다. 본질이 의대를 나온 의사이고, 주변에 있는 동기나 선배, 후배,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들까지 모두가 의사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제 3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료 일선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의사와는 달리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안을 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의학 드라마라기 보다는 로맨스 드라마라고 봐야할 Grey's anatomy


오늘은 제목과 같이 "과연 의사들이 많으면 환자 입장에서 좋을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재화나 서비스는 경쟁이 생기면 질적으로 우수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것이 경쟁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다. 당사자들은 피를 말리는 경쟁을 하지만, 그 속에서 승자는 이득을 취하고, 패자는 이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소멸된다.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승자는 독점이라는 우위를 가지게 되고, 그 지위를 남용해 서비스 가격을 높일 수도 있다. 그러면 또 다른 경쟁자가 등장하는 이유를 만든다. 이런 시스템은 공산주의와는 달리 지속적으로 사회의 발전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이런 자본주의 이론에 따른다면 "의사가 많아지면"  의료 서비스 경쟁이 심화되고, 결과적으로 "친절하고 저렴한 서비스"가 환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거의 틀린 말이다. 바로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집단"의 배타적 경쟁성"환자가 의사의 질적 수준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용어가 조금 까다롭게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쉽다.


현재와 같은 수준(수능 상위 0.1%가 의대로 몰리는 현상)으로 우수 인력이 유입되어 "질적으로 우수한 의사"가 무한히 많아진다면, 자본주의 이론에 따라서 경쟁을 통한 이득을 환자가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이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의사가 등장한다고 해도, 환자는 정확한 치료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산 장난감이 아무리 싸고, 많아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크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레고를 사주는 것처럼 의사가 많아진다고 해서 항상 안전한 의사만 많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능 성적이 우수하고, MEET 성적이 좋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인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성적이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적과 인성, 성적과 행복은 절대 비례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대를 입학할 정도의 수능 성적이나 MEET 성적은 그 사람의 노력을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척도와 같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같은 일을 같은 시간 안에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쪼개 쓰고, 남들이 한 번 보고 지나간 것을 적어도 다섯 번이상 보면서 놀고 싶은 것을 참아내는 능력은 수능뿐만 아니라, 대학의 모든 성적과 어느 정도 상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부분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자존심이나 평판과 연결되기 때문에, 일을 함에 있어서도 그 철저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연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의사의 최고봉(?)인 닥터 하우스(House)


피타고라스 시절부터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모든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바에 대해서 대가를 바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성향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자신이 노력한 바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올바르게 발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당시로서는 "노동의 결과를 공평히 나누어 받고 평등하게 살자"는 획기적인 시스템이었고 모두들 그 과실을 따먹을 것이라고 예상하였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인센티브가 없는 근로는 그 아무리 큰 희생 정신이 있다고 해도, 평생동안 지속적으로 하기는 힘들다. 


물론, 과거 "의사"라는 집단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았는 것은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과거에는 굳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직업적 보상을 받았고, 의사라고 해서 특히 더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IMF 사태 이후에 모든 사람들의 직업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고 나서는 직업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졌다. 대학 진로를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하는데, "직업의 안정성"이 그 어느 잣대보다도 높게 적용되었고, 그 결과 2000년도부터는 입시에서 의대 광풍이 불었는 것이 사실이었다. 과거의 의사들들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뿐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은 현재 더이상 안정성이 보장되지도, 그렇다고 음식점처럼 자신의 재량으로 정부의 감시없이 분점을 낼 수도 없다. 노동으로 따지자면 직접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도 없는 1차 노동이다. 그리고 진료 행위로 받을 수 있는 대가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현재 의사인 사람들은 그나마 명예 퇴직이나 조기 퇴직을 하지 않는 회사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위할 뿐이다. 


환자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끊임없이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면 의대에 진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광풍이라고 할 정도로 의대에 들어오기는 어렵고, 수능 전국 수석도 의대에 들어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의대를 진학하는 모든 친구들이 "나만은 예외일 수 있겠지" 하면서 의사로서의 멋진 삶을 꿈꾸면서 의대에 들어오고 있다. 아직까지는 과거의 영광을 가진 사람들이 생존해 있기 때문에…


최고의 왕진 의사를 다루고 있는 Royal Pains "일순간의 선택으로 병원에서 해고당한 의사 이야기"


자, 이런 상황에서 의사가 갑작스럽게 많아졌다고 가정해 보자. 현재 의대 TO는 어림잡아서 3300명정도 되는데, 300명 정도가 휴학을 하거나 중도 포기하거나, 의사 국시에 합격을 못해서 대체로 한 해 3000명 정도의 신규 의사가 배출된다. 그런데 이 인원이 5000명으로 갑자기 늘었다고 가정해 보자. 참고로 현재 우리 나라에 있는 의사 수는 11만명 정도이다. 


의대 TO가 갑작스럽게 5000명정도로 많아졌다고 가정하고, 시행 4년 정도만 되면 기존에 있었던 의사 수의 20%가 신규로 등장하게 된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경쟁을 하게될 것이다. 한 동안은 서비스의 질적인 측면도 보장될 것이고, 가격적인 측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환자 입장에서 유리한 측면이 살짝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의료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컨트롤하는 사업이다. 돈 나올 구멍이 국가 예산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애플 아이폰이나 삼성의 전자 제품처럼 전세계 소비자들이 구입하거나 세계로 수출을 할 수 있는 성질의 사업이 아니다. 따라서 같은 파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축적된 의사들이 나눠먹기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이야기이다. 줄 돈은 100만원밖에 없는데, 인원이 증가된다면 의사의 평균 소득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존에 진료를 보던 의사들은 그나마 벌어둔 돈이 있어서 가격을 낮춰도 살아갈만 하겠지만, 신규로 진입한 사람은 그 것마저도 쉽지 않다.


시행 10년 정도가 지나면, 이제 의사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에 비해서 매력있는 직업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요새 주변을 보면 자기 자식은 의사를 시키지 않겠다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열악해지는 것이다. 매력적인 직업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더이상 우수한 인재가 선택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과 동치이다. 허준이라는 드라마로 뜬 "한의사"라는 직업이 한의사 수요가 떨어지고 과학적 타당성이 위협받으면서, 수익이 줄어든지 채 몇년도 되지 않아서  소위 말하는 "배치표[각주:1]"에서의 위치가 하락하는 것만 봐도 미래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 


매력적이지도 않은 직업에 우수한 인재가 갈 이유가 없다. 면접을 해보면, 의대를 들어오고 싶은 이유가 오만가지가 있다. 개인적인 흥미, 희생, 봉사 등등 의사를 표현하는 모든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매력적인 직업"을 선택하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경제적으로 보상도 되고, 직업적인 만족도도 크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직업이 매력적인 직업이 아닐까?… 그리고 현재로서는 "의사"라는 직업이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성적이라는 척도에서 비교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선택하고, 결과적으로 경쟁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더이상 매력적이도 않고, 경제적인 리턴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면 과연 많은 사람들이 힘든 고생을 OK할까? 그리고 그 것을 사회 시스템이 잘못했다고 지적할 수 있을까?


실제로 이런 일들이 유럽에서는 벌어지고 있다. 국가가 학비까지 내 주고, 많은 우수한 인재를 리크루팅하려고 노력하지만, 유럽에서 최상위권인 학생들이 가는 곳은 오히려 금융가 쪽이다. 물론 아직까지 의대가 바닥을 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의대 광풍에 비해 상대적으로 들어가기가 수월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의사의 직업적인 매력(경제력, 지위 등)이 다른 우위에 있는 직업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일. 한국에서는 수술도구를 수술 전후에 비교하기 때문에 문제 생길 일이 거의 없다.


물론, 공산품이나 음식점이라면 질적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퀄리티가 좋으면 더 좋겠지만, 안 좋다고 해도 안 쓰면 그만이고, 음식점이라면 더이상 거기를 안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평생 가질 수 있는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작금의 현실에서 내 목숨을 맞길 수 있는 의사가 최고가 아니라면… 어떨까? 수술을 했는데, 깜빡해서 메스를 안에 두고 나온다거나, 단순한 감기인데, 에이즈로 오인해서 약을 처방하는 의사가 대다수라면 어떻게 될까?


제 3자의 입장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 개인적인 성품은 별개로 하더라도(간혹 성격이 X같은 경우가 있기는 함) 대다수가 꼼꼼하고 실수를 한다고 해도, 최소한 두번 실수를 하지 않는 학습 능력을 갖추었다. 환자를 보는 것에 있어서도 의료 실력이라는 측면에서 학습 능력의 부재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이게 시스템적으로 체크를 하고 학습하고 수련받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기본적으로 의사의 실력은 개인의 성취도와 노력, 능력에 많이 좌우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환자가 의사를 평가하기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혹은 자신의 손가락을 담보로 테스트해야 하는데, 그 의사가 저질이라서 목숨을 잃거나 손가락 불구가 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의사가 많아지면, 이런 저질 의사가 많아질 것이라고 왜 예상을 하지 못하는가?


현재 "의사가 많아져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현재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미래 세대의 의료 서비스 질을 담보로 잡고 있는 셈이다. 지금과 같은 인재와 의료 서비스 수준이 유지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도 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모든 일을 바라볼 때,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아야만 한다. 현재만 본다면 이득처럼 보이지만, 미래에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프레온 가스를 최고의 냉매로 오인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지구에 있는 오존층을 파괴한 것처럼.


공산주의의 의료 시스템에서는 병원이 공짜이긴 하지만, 병원에 가는 것조차 힘들다. 병원에 가도 병이 낫지 않는다. 책임감 없는 의사들이 가득이기 때문이다. 환자 한명을 더 본다고 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인센티브로 없고, 정시 출근, 정시 퇴근해도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대다수의 친구들은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일주일 근무 100시간만 하게 해달라고 하소연을 해도 근무시간이 너무 짧은 것 아니냐고 퇴짜를 맞고 있다. 초과 수당은 바라지도 않고, 하루 7시간 자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의사들을 왜 또 불평이냐고 여론은 말한다.


의학 드라마의 효시라 할 수 있는 ER(Emergency Room)


길게 글을 썼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의사가 많아지면 일시적으로 경쟁시스템이 작동되어서 이득이 될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의료 서비스의 질적 하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래 세대를 담보해서, 현재의 안위를 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의대에 들어가기 지금보다 더 힘들어 진다"하더라도, 현재처럼 최상위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하는 현상이 유지되어서 내 아이들이 책임감있고 실력있는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았으면 좋겠다. 그 것이 세상 모든 금전을 준다해도 살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내 아이의 생명을 유지하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순수한 정신도 치료를 통해 생업을 살면서 먹고 살만한 이후가 아닐까? 의사를 선택하는 집단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덜 노력해도 최선의 결과를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살 것이고, 많은 노력을 해도 결과가 적다면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더 해도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혹은 우리 아이들에게 너는 의사이니 한 평생 무한한 봉사와 희생을 바라면서 살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1. 개인적으로 배치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것도 현존하는 문화이고, 수능을 평가하는 단순한 척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시로 든 것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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