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닥 동백꽃


오늘도 또 우리 포닥이 막 쪼이였다. 내가 점심을 먹고 실험을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였다. 실험실에 들어가려니까 등 뒤에서, 포닥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옆 실험실 박사과정과 두 놈이 또 얼리었다.


점교수네 박사(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인데, 이번에 impact factor가 10점도 넘는 논문을 냈다)이 케이온의 미오가 프린팅된 티셔츠를 입은 뚱뚱한 우리 포닥을 함부로 해대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대는 것이 아니라, 클린벤치를 쓰고 뒷 처리를 잘 안 했다며 쪼고 물러 섰다가 또 CO2 incubator에서 곰팡이가 난다면서, 또 쪼아대었다. 그러면 이 못난 오덕 놈은 쪼일 적 마다 연신 땀을 흘려대며, 헉헉댈 뿐이였다. 


이걸 가만히 내려다 보자니 내 대강이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이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 대뜸 파이펫을 메고 달려들어 점교수네 박사를 후려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 먹고 헛매질로 떼어만 놓았다.


이번에도 점교수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 놈의 교수놈이 요새로 들어서서 1년마다 재계약하고 있는 연구교수인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렁거리는지 모르겠다. 


나흘 전 연구비 쪼간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고놈의 조교수가 논문을 썼으면 썼지, 남 실험하는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 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실험하니?” 하고 긴치 않은 수작을 하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도 교수회의에서 저와 나는 이야기도 잘 않고 서로 만나도 본척만척하고 이렇게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도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 일인가. 항차 망아지만한 조교수가 남 웨스턴 하는 놈 보구..


“그럼 혼자 하지 떼루 하디?”


내가 이렇게 내배앝는 소리를 하니까


“너, 연구하기 좋니?”


또는,


“2월이나 되어야 연구재단 연구비 공고가 뜨는데, 벌써 연구계획서를 쓰니?”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대인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실험실에 에어컨이 들어오니 이 놈의 계집애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제 연구노트를 할끔할끔 돌아보더니, 파일에서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언제 땄는지는 몰라도 일반연구자지원사업 여성과학자 협약서가 손에 쥐였다.


“느 연구실엔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 소리를 하고는, 제가 연구비를 준 것을 남이 알면 큰일날 테니 여기서 얼릉 써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여성과학자 연구비가 개꿀이란다.[각주:1]” 


“난 연구비 안 쓴다. 너나 써라.”


나는 고개도 돌리려지 않고 글러브낀 손으로 그 협약서를 어깨 너머로 쑥 밀어 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 때서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우리가 이 실험실에 들어온 것이 근 삼년 째 되어 오지만, 여지껏 가무잡잡한 점교수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가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협약서를 다시 집어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어질 듯 자빠질 듯 교수 휴게실로 힝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어쩌다 학장님이, 


“너, 얼른 부교수 되야지?” 하고 웃으면 


“염려 마서유. 될 때 되면 어련히 될라구....” 


이렇게 천역덕스레 받는 점교수였다. 본시 부끄러움을 타는 교수도 아니거니와 또한 분하다고 눈에 눈물을 보일 얼병이도 아니다. 분하면 차라리 내 실험실의 디프리저를 한번 모지게 후려때리고 달아날지언정. 


그런데 고약한 그 꼴을 하고 가더니 그 뒤로는 나를 보면 잡아먹으려고 기를 복복 쓰는 것이다. 


설혹 주는 연구비를 안 받아 먹은 것이 실례라 하면 주면 그냥 주었지 “느 연구실에는 이런거 없지?”는 또 뭐냐? 그렇잖아도 저희는 전임이고 나는 그 손에서 배재를 얻어 실험을 하느라 일상 굽실거린다. 내가 이 학교에 들어와 연구실이 없어 곤란으로 지낼 제, 벤치를 빌리고 그 위에 센트리퓨지 놓도록 마련해 준 것도 점교수네 실험실 호의였다. 그리고 우리 교수님도 실험할 때 연구비가 딸리면 점교수네 교실 가서 부지런히 빌려다 쓰면서, 인품 그런 교실은 다시 없으리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흔이나 된 것들이 수군 수군하고 붙어 다니면 학교의 소문이 사납다고 주의를 시켜 준 것도 또 교수님이였다. 왜냐 하면, 내가 점교수하고 공동연구를 했다가는 점교수네 교실이 노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연구비도 떨어지고, 연구실도 내쫓기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였다. 


그런데 이놈의 점교수놈이 까닭 없이 기를 복복 쓰며 나를 말려 죽이려고 드는 것이다.


(계속)


  1. 여성과학자 연구비를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소설의 비유상 특정 집단만 신청할 수 있는 연구비 종류를 선정하다 보니, 여성 과학자 연구비가 선택되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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