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의 단골소재. 특히나 요즘 들어 다른 애들에 비해 더더욱 자주 많이 대량으로 등장하는 좀비.
그들은 왜 살아있는 인간 포함 다른 포유류를 공격하는 걸까? 우아한 귀족같은 느낌의 뱀파이어야 신선한 인간의 피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좀비는 딱히 그래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뱀파이어물에선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의 공존(인지 인간 사육인지) 필요성에 대해 뱀파이어가 말하는 걸 가끔 볼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좀비에 의해 폐허가 된 도시엔 좀비외의 생명체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으며, 좀비들만이 꾸역꾸역 잘도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만약 좀비가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를 섭취를 못 해서 알아서 픽픽 쓰려져 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하지만 이제까지 나온 좀비물에서 그런 묘사는 내가 알기론 없다. 물론 살아 있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성분 중 무언가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가능성은 있지만, 자주 규칙적으로 섭취해야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굳이 섭취할 필요는 없지만, 살아 있는 인간이 별미라서 또는 엄청난 에너지 공급원이라서 인간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긴 하다. 이 가능성은 이 글에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그런데로 불구하고 좀비가 살아 있는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좀비의 가장 큰 특징인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공포영화나 게임의 단골 소재가 된다.  

더 하우스 오브 데드. 오락실가면 한 판씩 하게 되는 그 게임.

그 목적이 불분명하긴 하지만, 일단 좀비라는 것들은 살아있는 당신을 발견하면 죽자사자 기어오든, 절뚝거리며 걸어오든, 덤벼오기 마련이다.

우리 이걸 맹목적 공격성이라 하자. 아니 맹목적은 빼자. 나름 목적이 있을 수도 있으니(.....). 요 공격성, 그것도 거의 자동반응적인 공격성은 육식동물의 공격성과는 다르다. 육식동물은 일단 다른 존재를 발견한다고 해서 바로 달려들진 않는다. 그 놈이 나한테 위협이 되는 놈이지, 나보다 강한 놈인지 아닌지, 지금 내가 배가 고픈데 먹잇감이 될 만 놈인지 어느 정도 을 본다. 그런데 이 좀.비. 라는 놈들은 그런거 없다. 옆에 동료좀비(좀비에게 동료의식이라는게 없겠지...)가 쓰러져 나가떨어지던 말던 당.신.을 향해 끝없이 끝없이 다가온다.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두가지 특징은 눈치챌 수 있는데, 좀비라는 놈들은 자기보호보능(모든 생명체에게 필수적인!)이 없다는 것과 공감능력(옆에 자기랑 비슷한 다른 좀비에 대한)이 없단거다. 이 두가지 특징은 고통을 못 느끼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팔다리가 총이나 도끼에 맞아 너덜거려도, 통증이 안 느껴지다보니 그냥 무심할 수 있겠다. 본인의 팔다리에도 그럴진데, 하물며 옆좀비의 파괴와 손상에 공감할 수 있을리가 없다.

자신의 하반신이 뜯겨지더라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기어오는 좀비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벌써 세가지 특징이나 잡아 냈다. 과도한 공격성, 그의 바탕이 되는 자기보호본능과 공감능력의 부재, 이 두 가지 부재의 전제가 되는 통증감각의 부재.

통증감각을 못 느낀다는 것 부터 보자. 통증을 못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코리안 좀비 정찬성과 관련한 포스팅이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그런데 이 통증을 못 느낀다는 것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특히 자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생명체에겐 말이다. 

실제로 선천적으로 통증을 못 느끼는 질환을 앓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 아이들 아주 살기가 힘들다. 안 아프니까 자기 눈을 찌르기도 하고, 칼로 팔다리를 그어 피나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도 하고, 불에 그을려 보기도하고, 일부러 그러지 않더라도 언제 다친지 모른채 상처가 곪기도 하고, 뼈가 부러지거나 관절이 어긋거나 몸이 성하지 않은 거다.

8세의 Gaby, 각막을 자꾸 긁어대는 바람에 왼쪽 안구는 들어내었고, 안구 보호를 위해 수경을 씌웠다.

 생명체가 자기를 유지하고 종족번식 또는 자기복제라도 하려면 이로운 걸 가까이하고, 해로운 걸 멀리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중 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좁게는 통증 넓게는 불쾌한 느낌이라는 거다. (그런데 좀비는 요걸 못 느끼기 좀비는 좀비 자신의 생존에 적합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서 좀비 바이러스 가설이 그럴 듯하게 먹히는 거다. 바이러스만 번식할 수 있다면 바이러스 숙주로서의 신체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말이다.)

통증과 자기보호본능은 이렇게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공감능력은 어떠한가? 사자가 동료사자의 고통에 맘 아파할까? 요건 신기하게도 얼마전에 쥐실험에서 증명되었다.

갇혀 있는 친구쥐를 구해주려는 우리의 서鼠선생

 <Science>에 실린 논문[각주:1]에 따르면 쥐만 하더라도, 좁은 철장에 갇혀 있는 쥐의 고통에 공감하여 풀어주려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포유류, 조류, 어류, 그 이하로 내려가면서 생각해보면 모든 생명체가 공감능력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극단적으로 단세포동물이 공감능력이 있을까? 그렇다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어느 정도 진화를 한 동물들, 적어도 두뇌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동물은 되어야 공감 능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통증을 못 느끼고, 공감능력이 없다는 것만으로 좀비의 공격성을 설명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걸  성향, 성격의 문제로  단순화 시키면 좋은 예가 있다. 피니어스 게이지 아저씨다. 

본인의 두개골을 뚫어버린 철근을 기념품처럼 들고 있는 게이지.

열차 선로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철근이 두개골을 통과하는 사고를 당한다. 그로인해 전두엽이 완전히 파괴된 게이지씨는 사고 전의 사려깊고 조용한 성격과는 180도 달라져, 화를 참지  못하고 폭언을 일삼으며 폭력도 서슴치 않는 성격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파괴되어 버린 전두엽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프로이트가 말한 Superego 또는 Ego나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의식 (Consciousness) 을 통합 관장하는 부위가 전두엽이라는 이론도 제기되는 만큼 전두엽이 우리의 Id 또는 폭력적인 본성을 억누르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자의 입장에서 뇌를 구별하면 위 그림과 같이, 신피질, 피질, 변연계영장류, 포유류, 파충류의 뇌로 구별할 수 있다. 전두엽 중에서도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은 영장류 이상의 동물에서 특히나 발달되어 있다. 이 부분들이 파괴되고 피질, 변연계 뇌만 남는다면 공격적 본성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고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쥬라기 공원의 티라노사우루스나 밸로시랩터를 상상해보자. 아니면 뱀이나 왕도마뱀, 악어를 상상해보자. 그 파충류들이 어떻게 당신을 대할 지 예측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예측불가능함에는 그들의 공격성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좀비는 인간의 죽어버린 신체로 보일 뿐 "육식파충류의 뇌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거기에 고통을 못 느끼는 특성까지 더해, 그 공포스러움이 배가되는 것 같다. 



  1. Empathy and Pro-Social Behavior in Rats [본문으로]

의과학을 하다 보면, 다양한 논문을 읽게 됩니다. 자신의 분야를 다루는 논문을 읽는 것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간혹 자신의 분야와 동떨어진 분야의 논문을 읽기도 합니다. 


실제로, 의과학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논문을 평생의 동반자(?)로 삼는다"는 것과 동치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연구에서 논문이 차지하는 위치는 큽니다.


논문(Journal)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에 대해서 과학자라면 대부분 고민하고 자기 나름의 기준을 설정하고 있겠지만, 조금 더 간략히 설명하기 위해 포스팅 합니다.  


                  



사실, 논문은 따지고 보면, 주간지나, 월간지 같은 잡지일 뿐입니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자신의 연구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Nature도 따지고 보면 "주간 조선" 과 같은 잡지일 뿐입니다.


(명확한 독자층 호불호가 갈리는 주간 조선. 독자에 따라 찌라시인가 언론 매체인가의 평가가 극명하죠)

그렇지만, "주간 조선"과 Nature는  그 게재 기준이나, 독자 층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싣고자 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이 역시 (Cell Sciece와 비교해)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찌라시라는 평은 절대 듣지 않을 과학 잡지 Nature) 


논문은 단순히 말하면, 연구 그룹이 연구 결과를 보고하고 논의하는 성과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주간 조선처럼 나오는 주간지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다른 과학자들이 그 결과와 증명 과정을 꼼꼼히 확인한다는 점이 차별화된 점이겠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개발한 을 이용해서 

감기 환자를 치료해 보았더니, 

며칠 뒤에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이 상황 자체로만 본다면, 이 약은 감기에 아주 효과적인 약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광고를 해대는 의료 기관도 있습니다. 무슨 비기, 비법하면서....) 하지만, 이 사실에서는 극단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진짜 약 때문에 나아진 것인지, 아니면 약은 효과가 없지만, 자연적으로 병세가 호전되었는지 단순히 위 환자 1개 사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이 "연구 결과"를 보고하면, 동료 과학자들은 "그게 무슨 약효를 증명하는 것이냐? 약효가 진짜 있는지 증명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한 연구가 아니다"라면 퇴짜를 놓겠죠. 아니면, "진짜 약효를 보려면 이런 이런 실험을 하거나, 비교 대상을 두고 실험해라" 라고 코멘트 하겠죠.


그럼 그 "약효 연구"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 연구자(이 시점에서는 연구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는 다양한 비교 실험을 수행하고, 통계적으로도 진짜 약효가 있는지 확인하게 되겠죠.


그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감기에 "이 약이 효과가 있다"가 될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 통계적으로 무의미하고, 그냥 약이랑 상관없이 병세가 호전되었다"로 결론짓게 되겠죠. 


이런 일련의 과정이 바로 논문이 나오는 과정입니다.


연구자가 자신의 가설을 설정하고, 그 설정한 가설을 토대로 실험을 전개한 후에, 논문에 게재 요청을 하게 되면, 그 논문을 출판하는 곳에서는 일련의 과학자(일반적으로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과학자)를 초청해서 꼼꼼히 검토를 하게 됩니다. 그 검토 결과, 충분히 학문적인 가치가 있다면 게재를 하고, 보완해야할 실험이 있으면, 실험을 한 연구자에게 추가 실험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하나의 연구가 의미있는 지식으로 재편되어, "논문"으로 출판되는 것입니다. 


위 과정에서 동료 과학자들이 꼼꼼히 실험을 검토하는 과정을 Peer Review라고 하고, 보완 실험을 하거나 추가로 데이터를 확인하는 과정을 Revision이라고 합니다. 


다시 주간 조선과 Nature의 이야기로 돌아 가면, 주간 조선의 경우, 편집인이 전반적인 방향 설정, 기사 주제 설정을 하고, 선발된 기자들이 그에 따른 기사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해, Nature는 위와 같은 Peer Review를 거쳐서 편집인이 최종 게재 승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물은 물론 잡지의 형태로 나오게 되죠. 


따지고 보면, 과학 잡지는 연구자 개개인이 기자가 되어 자신의 결과물을 보고하고 동료 과학자가 평가, 게재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편집인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잡지마다 편집인이 전권을 휘두른다거나, 보조적인 역할만 한다는 등 특징은 다릅니다. 


참고로, 학술적 가치가 높고, 잡지 수준이 높다는 것은 동료 과학자들이 조금 더 엄격하게 심사를 하고, 높은 수준의 결과 유의성을 보이고, 의과학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높는 말과 궤를 같이 하긴 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연구 시류나 유행 등을 따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연구 결과의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논문은 그 나름의 지식이 내포되어 있고, 항상 높은 수준의 논문만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논문의 가치는 논문의 내용과 과학적 추론의 방향 등으로 따져야 하지, 그 논문이 실린 잡지사의 평판으로 따져서는 안됩니다.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조그마한 결과 보고의 논문에도 출판된 이후에 감동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감동은 소위 말하는 "큰" 논문을 내나, "작은" 논문을 내나, 자신에게 주관적으로 다가옵니다. 따라서, 출판한 논문으로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맙시다 ^^



실제로 논문 자체는 낮은 수준의 잡지에 실렸지만, 아주 큰 영향력을 가진 논문도 있고, 심지어, 컨퍼런스에 발표된 논문이 노벨상을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His work was filed as a patent application in 1985, and after the patent application was made public reported at the Annual Conference of the Mass Spectrometry Society of Japan held in Kyoto

(학사 연구원으로 학사 졸업 논문으로 달랑(?) 

하나의 논문(특허)을 내고, 노벨상을 탄 연구자 고이치 다나카)


의과학 연구를 하는 모든 분들이 즐겁게 연구하면, 논문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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