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 수업에 대한 글

2025. 10. 21. 11:24MD : Doctor/Medical Doctor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많은 의대생이 본과에 진입하면서 처음 배우는 과목이 해부학이기에,
이를 통해 비로소 ‘의대생이 되었다’는 실감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과 과정에서 해부학을 배우더라도 이러한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인체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부학 실습을 통해 ‘돌아가신 분’을 맞이해야 한다는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해부학이 수백 년간 의학과 동의어처럼 여겨졌던 역사적 배경도 한몫할 것입니다.

우리 대학에서는 3월과 4월 동안 해부학, 조직학, 해부 실습, 발생학(태생학), 영상 해부학을
통합하여 가르칩니다.

장기가 형성되는 과정부터 미세 구조, 거시적 형태까지 배우며, 학문적 연계성과 흐름을 고려한
교육 과정이지만, 학생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해부학을 가르치면서 제가 느끼는 어려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해부학은 복합적인 특성과 방대한 학습량을 요구하기에, 예상보다 훨씬 큰 강도로 다가왔고,
때로는 제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분자생물학과 면역학의 아름다움을 경험했기에
지금은 해부학 공부를 나름 즐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포닥 과정에서 발생학을 공부한 것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시험만을 놓고 보아도 그 부담감은 상당합니다.

중간·기말고사뿐만 아니라, 해부학, 조직학, 태생학, 영상 해부학 시험과 실습 평가까지 포함하면
총 10번의 공식 시험이 있으며, 약 600여 개의 문제가 출제됩니다.

학생들에게도 힘든 과정이지만, 매년 새로운 600개의 문제를 출제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해부 실습은 총 16회 진행되며, 매회 5시간 이상 이어집니다.

학생들은 실습을 통해, 이미 생을 마감한 분들로부터 의학적 지식을 배워갑니다.

그러나 저는 학생들의 예상치 못한 질문과 실습 기술을 지도하며,
어느새 실습대에 누워 있는 cadaver와 같은 초췌한 상태가 되어버리곤 합니다.

가끔은 정말 실습대 위에 누워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실습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오면, 저를 기다리는 대학원생들과 연구원들이 있습니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과학을 논의하는 시간은,
해부학 수업 기간 동안 가장 큰 활력소가 됩니다.

늦은 저녁, 이들과 디스커션을 마치고 나면, 마치 시험 전날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 듯
다시 힘이 나는 기분이 듭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큼은 충만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서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동시에 공동 연구 계획과 이메일도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부 실습 시험은 해부학 교육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교수들 역시 출제 전날 시신이 가진 수많은
해부학적 변이와 씨름하며 문제를 선정합니다.

교과서와 최대한 유사한 형태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하루가 훌쩍 지나가곤 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시작되면,
혹시나 있을 학생들의 부정행위 방지 및 돌발 상황 대비로 인해 긴장감이 감돌고,
시험의 클라이맥스는 오히려 교수들에게 더 극적인 순간이 됩니다.

지난해에도 강의로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여러 교수님들과의 협업, 시험 준비, 새로운 평가 방식 도입, 논문 제출 및 수정, 연구실 운영까지 더해지면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 학교에는 저를 포함해 경험 많은 해부학 교수님들이 계시기에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으며, 학생들과의 교류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매년 이 두 달간 해부학 강의에 집중하다 보면, 연구자로서의 제 정체성이
점점 흐려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강의와 실습이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동안, 연구를 위한 재교육과 최신 과학적 업데이트는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다행히 연구실 구성원들이 성실히 연구를 진행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위안이 되지만,
저 스스로는 과학자로서 두 달 전의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밤마다 저를 괴롭혔습니다.

때로는 꿈속에서 이전 포닥 연구실의 보스였던 Max가 등장해 “지원! 이렇게 하면 안 돼.”
라고
다독이기도 하고, 공동 연구를 함께하는 친구가 나와 “안주하지 말고, 함께 더 나아가자.”
라고
독려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늘 다정한 동료들인데, 저는 이들과 멀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해부학을 가르치며 얻게 된 것도 많습니다.

인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갖추게 되었고,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도 얻었습니다.

학생들과의 관계도 (적어도 제 생각에는) 즐겁게 형성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이 두 달을 버티기 위해 해부 실습 cadaver처럼
초췌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놓쳐버릴 많은 것들이 걱정스럽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희망적인 점은,
이 두 달을 제외한 나머지 열 달 동안은 연구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