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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도약 이끈 슈뢰딩거방정식은 ‘간통’ 덕분?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 숙였고…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화양연화’왕가위 감독의 2000년 작품 ‘화양연화’는 간통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62년 홍콩. 거실과 주방을 공유하는 공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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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동아 사이언스 기사이네요. 간략하게 정리하면, 과학계 간통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몰랐던 사실이라 흥미롭네요.

 

가끔씩 미국이나 유럽에서 들리는 이런 소식들을 보면서, 어찌 이들 서양 사람들은 과학적 업적(?)과 개인 사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찌보면, 과학적 발견이랑 업적은 개인의 사생활과는 별개로 다루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는 관점에서 본다면 맞는 이야기 같아 보이고, 반대로, 우리 나라나 동양의 인식으로는 이런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완전 때려 죽일 놈이 되는 것이지요.

 

아마도, 슈뢰딩거 같은 케이스가 한국에서 나온다면, 노벨상을 탄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아고라나 네이트 판에서 불륜으로 엄청 털리고, 언론에서 엄청 또 한 번 털리고, 다음에서 교수직 박탈 서명 게시판이 열리고, 나무 위키에서 자세한 사건 사고 소식으로 정리가 되면서 결국, 기자 회견과 함께 교수직 사임, 전혀 관계가 없는 연구비 회수, 연구비 횡령 조사, 세무 조사 등등으로 털리겠죠. 생각해보면, 연구 업적과 개인 사생활의 영역인 불륜(?)은 큰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일종의 연좌제(?)인 셈이죠.

 

불륜이라서 조금 감정이 고양될 수 있어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이렇게 개인 사생활 영역과 연구 업적을 많이 연관시키는 사례는 우리 나라에서 많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에요. 예컨대, 위 슈뢰딩거 사건이 불륜이 아니라, 식당 내 갑질 사건으로 변환 시켜도, 위 이벤트가 반복될 것 같아 보이고, 개인의 영역에 있는 어떤 문제를 대입해도, 결국 사람들은 화가 나서, 교수직이나 연구직을 박탈하라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요.

 

크게 본다면, 과연 이런 상황이, 즉 개인의 영역에 있는 사생활 문제가 공적인 부분이 연구 영역과 합쳐서 평가되고, 징벌을 주는 것이 합당한가의 가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어요. 제가 겪은 미국이나 유럽도 저런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아예 안 쓰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리를 해서 적용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예컨대, 불륜설이나 염문설로 화려하게 신문 1면을 장식하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 하지만, 이런 개인 사생활의 문제가 프랑스 대통령 수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인식하는 일반 프랑스 시민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학적 업적 혹은 직업적 생활과 개인의 사생활. 과연 함께 다루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분리해서 업적은 업적, 개인 사생활은 사생활 영역으로 두고 나누어 다루는 것이 맞을까요? 그리고 만약 두 개를 나누어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런 나눔(?)에 대해서 준비되어 있나요? 누군가 개인 사생활 문제가 있을 때, 사생활과는 별개로 업적을 인정하고, 과학적 가치를 존중해 줄 수 있을까요?

 

예컨대, 내 동료가 슈뢰딩거고, 저런 짓(?)을 하고 있다면, 양자역학의 토대가 되는 방정식은 방정식대로 인정하고, 개인 사생활은 별개라고 말하면서 신경쓰지 않을 수 있나요?


여담이지만,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커플로 대변되는 open relation 혹은 open marriage에서는 저런 슈뢰딩거와 아내 안네마리의 관계가 서로간에 합의가 된 관계이기에 정상(?)이라고 합니다. 도덕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죠. 슈뢰딩거는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이런 생활이 나의 창의성을 활성화하는데 더욱 큰 도움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일반인이 보기에 부적합한 개인 사생활이 궁극적으로 과학적 업적의 무궁한(?) 발전을 이루어 낸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슈뢰딩거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 아래 기사 발췌------------------------

 

슈뢰딩거는 거의 평생 끊임없이 새로운 연인을 만들었는데, 그 자신이 간통을 해야 창조력이 생겨 연구가 잘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1925년 비엔나에 사는 오래 전 여자 친구(끝내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와 함께 스위스 아로사로 크리스마스 밀월여행을 떠나 현지에서 완성한 게 바로 슈뢰딩거 방정식이다. 만일 슈뢰딩거의 간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그 난해한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으로 양자이론을 배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슈뢰딩거가 이처럼 대놓고 이 여자 저 여자와 바람을 피울 수 있었던 건 역시 자유분방했던 아내 안네마리와 당시 유럽대륙의 사회적 분위기 덕분이다. 안네마리도 벡터의 개념을 정립한 천재 수학자 헤르만 베일과 간통에 빠져 있었다(베일의 아내도 다른 남자와).

 

한 걸음 더 나가 패보는 마크를 연구소로 영입할 계획을 세운다. 패보의 요청으로 린다는 남편에게 간통사실을 고백하고 마크는 며칠 동안의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린다. 즉 사생활과 연구를 구분하기로 한 것. 1998년 라이프치히에서 연구소가 문을 열 때 마크와 린다 모두 연구원으로 와 있었다. 패보는 스토네킹 가족과 한 집에서 살며 린다와 애정을 키웠고 마크는 새로운 연인을 만났다. 2005년 패보와 린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 뒤 마크와 린다는 우호적으로 이혼했고 2008년 패보와 린다는 결혼했다.

때는 2014년 2월이었습니다. 
국시를 치르고 나서 미국 LA에 있는 LAC+USC Medical Center에서 종양학 실습을 하는 동안 Amir Goldkorn, M.D. (이하 금옥수수 교수님) 을 만났습니다. 금옥수수 교수님과 함께 일주일 동안 신장요로 종양 병동을 회진하고, 병례 토의를 하고, 토픽 발표를 하는 등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대화를 하던 중 그 분이 본인의 연구실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여러 임상 시험들을 진행하면서, 또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서 실험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금옥수수 교수님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저도 교수님처럼 환자를 보면서도 연구를 활발히 하고 싶습니다. 어떤 진로를 선택해야 할까요?

라고 물었고, 교수님은 이렇게 답해주었습니다.

나는 박사 과정을 밟지는 않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임상 수련을 마칠 때까지 6년 정도를 연구실에 있었어. 생각해보니 6년이면 박사를 받을 수도 있었겠네. (웃음) 일단 충분한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그리고 매우 바쁘게 살 각오를 해야해.

알고보니 그 분은 UCSF 혈액종양 내과에서 임상 펠로우 트레이닝을 받은 후, 추가로 3년을 Elizabeth Blackburn, Ph.D.[각주:1]의 연구실에서 박사 후 연구원[각주:2]으로 있었습니다. 지금 교수님은 텔로미어를 합성해내는 효소인 텔로머레이스를 표적으로 하는 항암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금옥수수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미국에서는 의대에서 교수가 되어 연구실을 운영하는데 박사 학위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점과[각주: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학위 과정에 맞먹는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야 한다는 점입니다.[각주:4]


이 대화를 밑거름으로 저는 박사를 지원할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도, 우선 연구원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지금 일하고 있는 연구실을 찾은 계기와 인터뷰 내용, 그리고 펀드를 받은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1. 2009년 텔로미어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신 분입니다. 텔로미어는 염색체의 양쪽 끝에 위치한 핵산과 단백질 복합체로, 염색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본문으로]
  2. Postdoctoral Researcher. 우리말로는 박사 후 연구원으로 번역하지만, 사실 doctorate degree는 Ph.D.나 D.Phil.과 같은 research doctorate과 M.D., J.D., D.V.M.과 같은 professional doctorate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M.D. 학위만을 가진 사람도 post-doctoral researcher로 일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3. 다만 한국은 사정이 다릅니다. 박사 학위가 있지 않으면 교육부 인가 교수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으로]
  4. 의대에서 받는 다양한 학위가 궁금하시면, http://mdphd.kr/100, http://mdphd.kr/105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으로]

안녕하세요, xOculus입니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고민 많던 의대 시절 MDPhD.kr의 주옥 같은 글들을 읽으며 향후 진로에 대한 영감받았고, 먼저 걸어가시는 들에 대한 존경심 있기에, 기에 글을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진으로 대해주신 오지마법사님께 감사드리는 입니다.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하고자 니다. 글부터 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조금 부끄러우나, 경을 이해하시면 으로 제가 고자 하는 글들을 이해하시는데 도움 것이기에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초등학교 대퇴골두 무혈관성 사라는  진단 받고, 대퇴골의 부분을 절단하고 으로 고정하는 수술을 받은 후, 한 학기를 에서 신 기브스를 한 지냈습니다. 이 기간 안 '수학귀신'이라는 하고는 수학의 매력흠뻑 빠져버렸습니다. 로부터 저의 장래희망수학자이었고, 대학교 정수론학 책을 해서 읽을 정도로 정적이었습니다. 제 은 에르되시 (Erdős Pál)이나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G. H. Hardy) 같은 세계적인 수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했던 신념은 고등학교 시절 지루한 입시 수학 부를 하며 들리기 시작했고, 의대에 합격할 수 있는 확률이 다고 생각한 부모님의 설득 최종적으로 의대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다른 전공을 선택하였지만, 여전히 학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대학교 자기소개서에도 수학을 이 공부한 경험을 서술하였고, 의과학자로의 부를 뚜렷밝혔습니다. 

과에 들어와 주로 학과 수학 과목들을 재미있게 수강하였고, 과 1학년 때 배우는 의과학 과목들(생리학, 생화학, 해부학, 리학 등) 한 학구적인 교수님들의 가르침 래에서 즐겁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과 3학년에 진입하면서 심각한 정체성 혼란에 빠집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본과 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제가 의사가 되는 길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의학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의학자의 길'이란 각인이 새겨져 있었는데, 저는 그 길을 걸으며 도서관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가 목표로 하는 의학자가 되어가는거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본격적인 임상 교육을 받기 전에는 제 스스로를 의학자로서만 바라보았지, 임상가로서 바라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과 2학년 2학기 때 임상 블록들을 배우면서 '이건 내가 아하는 공부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긴 하였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니 저는 전히 무방비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고체계와 임상가로서 필요한 사고체계는 다소 달랐습니다. 저는 연역법에 의존한 사고체계에 했고, 임상 의학은 대부분 귀납적인 사고체계를 바탕으로 합니다. 저는 임상 제를 마치 수학 문제 대하듯이 접근하였고, 이는 처절한 배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저에게 았던 부분은, 임상의학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려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재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실천해내는데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었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무엇보다도 자의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설계부터 시행까지 제한이 많습니다. 저는 지식의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서, 과학이라는 분야에 새로운 지식을 더하는 사람이 되고 었습니다. 

그래서 전 방황을 시작합니다. 임상 연구에 참여해보고, 생리학 실험실에 가서 실험도 해봅니다. 수학과로 전과하려고도 생각해보았고, 그 과정에서 유급도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든 의대를 재학하는 동안에는 한 달 이상의 자유 시간을 구하기가 어려웠기에, 일단 졸업을 하고 생각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고, 무사히 시에 합격하고 의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이 다음 글에서는 제가 졸업을 한 후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미국에서 지렁이(C. elegans)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연구 기회를 얻었고, 어떤 식의 시행 착오를 걸쳐서,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동기로부터 연구를 시작한다. 그것은 학문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가장 이상적인 사례다!), 졸업, 승진/취업, 또는 연구비 수주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그냥 해야 되나보다 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봤다. 이렇게 다양한 동기로 시작된 연구의 끝은 하나로 수렴한다. 논문 출판. 자기가 얻은 결과를 정리하여  자신의 언어를 통해 다른 연구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줌'으로써 끝나는 것이다연구를 '계획'하고, 이론 작업이나 실험을 통해 '데이터를 얻고', 이를 해석하여 '새로운 지식' 을 얻는 과학적인 활동은 일면 격식을 차린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문적 성과는 최종적으로 논문으로 정리된다. 따라서 '훌륭한' 과학자는 '효과적인 논문 작성' 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를 진행한다. 훌륭한 과학자는 결국 효과적인 글쟁이다.

(출처 - 링크)

논문을 통해서 전파되는 '새로운 지식 발견'의 영광은, 논문을 작성한 '저자'에게 돌아간다. 특히나 저자가 많은 '의생명과학' 논문들의 credit은 제1저자 (first author), 마지막 저자 (last author), 그리고 책임저자 (corresponding author) 가져가는 일이 많다. 보통은 마지막 저자가 책임저자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 저자가 그 연구의 전체 책임자이다. 제1저자는 보통 그 연구 자체를 일선에서 직접 수행한 박사과정 학생이나 박사후 연구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중간 저자는 제1저자와 마지막 저자가 아닌 저자들이다.

우리의 비극은 한 연구의 수확이 '논문의 특정 저자'에게 불균등하게 돌아가는 데에서 시작한다. 한 연구를 마치는 데 참여한 개개인 과학자의 공헌을 수치화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공동연구가 더 많아지고 있는 최근 연구에서는, 심지어 저자들 사이에서도 누구의 기여도가 더 큰지 알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논문을 읽는 독자들은 수 많은 저자들 중 누가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알 방법이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사람들에게는 앞뒤 다 자르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만 남아있기가 쉽다. "A 교수" 그룹에 있는 "B" 연구자가 "C"를 발견했대. 다시, "A"는 마지막 저자나 책임저 자일 가능성이 높고, "B"는 제1저자이다. 졸업/승진/취업/연구비수주 등 논문으로 파생되는 다양한 과실을 얻기 위하여 현대의 과학자는 논문의 "중요한 저자"가 되어야만 한다. 연구를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논문의 제1저자나 교신저자가 되는 순간, 그 연구의 영광을 대부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학계의 일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문의 '저자됨 (authorship)'을 가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본다.

First authorship이나 corresponding author를 놓고 공동 연구자들 끼리 또는 심지어 같은 실험실 안에서도 science와는 거리가 먼 눈치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주 드물지 않게 공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명예 저자'가 되는가 하면,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불합리하게 저자 목록에서 빠질 수도 있다 (유령 저자). 자신이 기여한만큼 좋은 authorship을 갖지 못했다는, 교수님이 내 연구성과를 논문이 간절히 필요한 (졸업 등을 위하여) 누구에게 주어버렸다는 볼멘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좋은 authorship을 향한 경쟁은 현대를 살아가는 과학자들에게 불가피한 것이지만, 의외로 이를 명확히 정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은 없다. 그리고 소위 'MD lab'에서 일어난다는 많은 분쟁(?)들도 기원을 찾아들어가면 'authorship' 인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직 연구 책임자 급도 아닐 뿐더러 학위과정 초기부터 시작해도 아직 채 10년이 되지 않은 초짜 과학자일 뿐이지만 (그래서 authorship을 정할 위치는 아니지만...) authorship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은 가지고 있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authorship을 어떻게 정하느냐는 현실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활발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최종 authorship 결정 권한은 연구 책임자에게 있다.

모든 저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결정은 연구 책임자가 내린다. 이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만약 연구 책임자가 공정하지 못한 사람일 경우, 열심히(!) 연구한 사람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이나 연구원은 본인이 아무리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도 현실적으로 그 결정에 반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를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그 연구실에 합류하기 전, 지금까지 쭉 그 실험실의 authorship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publication들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실험실 사람들과 인터뷰하면서 그 실험실의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공정하지 못한 실험실이라고 판단되고 자신이 authorship에 민감할 경우 그 실험실에 합류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런 것도 알아보지 않고 덜컥(!)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은 조금 어리석은 일이다.

2) First author는 논문 draft를 직접 작성해야 한다. 

"논문"의 "제1" 저자이다. 첫번째 저자가 논문을 직접 작성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이상하다. 개인적으로는 실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것 만큼 '논문'을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논문을 직접 쓴 사람은 그 연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어떤 display item (figure/table)을 어떤 위치에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어떤 story를 만들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한데 녹여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이것은 실험을 직접 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고 고통스런 작업이다.

자신이 first author가 될 정도로 이 연구를 이끌어왔다고 생각한다면, 논문을 쓰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Draft를 쓰지 않았다면 first author가 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난 크게 이상할 게 없다고 본다. 연구 책임자의 스타일상 책임자가 직접 논문을 쓴다면, 적어도 main table 과 figure들은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경우에도 논문의 draft를 직접 쓰는데 참여하도록 지속적으로 시도하여야 한다. 

3) 책임저자 그리고 마지막 저자.

사실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저자는 그 연구그룹에서 가장 senior로서 연구를 주도하였거나, 가장 큰 연구비를 마련한 사람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본다. 두 세 연구팀이 공동 연구를 하였다면, 공동 연구팀의 책임자들이 책임저자를 공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드문 경우로 그 연구가 책임senior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실질적으로 주도되었다면, 마지막 저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책임저자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4) 중간 저자

어려운 문제이지만 연구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한 사람이면 저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지식'생산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예를 들면 중요한 샘플을 제공하였다든가 의뢰를 받고 단순 실험을 한 경우에도 실질적으로 이들이 도움이 없다면 연구를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원할 경우 중간 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느 선까지 저자가 될 수 있느냐는 연구 책임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 사람의 과학적인 성과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혹시 논문 한 두 편 정도야 우연히 좋은 저자가 될 수도, 반대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그 사람이 출판한 논문들을 모아놓고 보면 그 사람이 '평균적으로' 어떤 과학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따라서 authorship이 공정하게 정해진다는 '신뢰'가 있고 호흡을 길게 가져갈 수 있으며, 그 사람의 가치를 논문에 적인 저자 리스트가 아니라 실제 능력으로 결정하는 환경에서는 논문 한두편의 authorship에 크게 민감해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졸업/승진/취업/연구비 수주에 논문 편수와 impact factor, 그리고 authorship이 매우 중요한 것이 우리 현실이라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정답은 없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잘못된 환경들을 바꾸어 가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공정치 못한 연구 환경에서 authorship을 얻기 위해 분산되는 그 시간과 노력만큼 우리의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science를 바로 앞에 두고!


미국에 와서 일기처럼 매일 글을 쓰고 있긴 하다. 글 쓰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논리를 생각하고, 그림을 생각하고, 잘 안 되는 한글(?)을 쥐어짜 내는 것. 모든 환경이 영어로 대화를 하다 보니 on-off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긴 하다. 아~~~ 쉽지 않다. ^^ 

 

오늘은 일기같이 생각의 흐름을 그냥 쓸 생각이다. 주제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어를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적이 없는 대다수의 한국인처럼, 나 역시도 내 분야가 아닌 영어에는 그리 밝지 못하다. 예를 들면, 채소 같은 것. 상추와 배추는 미국인 입장에서는 초등학생 수준[각주:1]만 되어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인데, 내 기억으로 배추는 배운 적이 있어도, 상추는 배운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이런 예들은 많다. 나 혼자 가서 장을 볼 때는 내가 굳이 상추가 "lettuce"인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상추가 무엇인지 모양도 알고, 맛도 알고 있고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추를 설명하거나, 상추 심부름을 외국인에게 시키려고 하면, 상추가 lettuce인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다양한 야채들. 나는 무슨 맛인지도 알고, 가격도 알고, 어떤 요리에 넣어야 하는지도 아는데, 용어를 몰라서 사오라고 시킬수가 없다.)


생각보다 이런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참고로, 공인 영어 점수가 그 사람의 영어 실력을 완벽히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반영은 한다고 본다는 측면에서 나의 토플 점수와 토익 점수는 아주 높다. 자랑 같지만, 거의 만점에 근접하기 때문에, 나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로 하고, 제대로 알아듣는다. 그리고 부당하게 느끼는 점이 있으면 따지는 것까지 충분히 한다. (얼마 전에도 항공사와 관련하여 일이 있어서 강력히 클레임을 걸었다.) 아울러, 그 분야가 학습이거나 내 분야를 다루는 것인 경우에는 거의 무리가 없다고 보고 있다.(토플의 목표가 바로 영어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외국인과의 대화 중에 상추와 같은 단어가 있으면, 가끔씩 바보가 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상추 말고도 그런 예는 많다. 식물 이름(예를 들면 밤나무, 상수리나무, 전나무, 고목 등등), 동물 이름(개미핥기, 도롱뇽, 뱀 말고 방울뱀, 청설모, 두더지 등등), 음식 이름(펜실베이니아 더치, 프렌치토스트) 채소 이름 (대파, 쪽파, 부추 등등[각주:2])등은 원어민 입장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초등 수준의 단어[각주:3]이지만, 한국에서 나는 접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이런 단어가 대화 사이에 끼이면, 나는 크게 공감할 수가 없고 알아 듣는 것도 쉽지 않다. 필요할 때마다 학습해서 배울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다 배울 수는 없다는 점이 한계라면 한계인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생활에는 큰 불편함이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 일하는 것에도 큰 불편함은 없다. 굳이 상추를 몰라도 연구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진지하게 나랑 같이 일하는 애들(대학원생,석사생,학부생)을 모아 두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겠지만,아래와 같은 맥락으로 결론이 났었다.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들은 내가 외국인(한국인)이기 때문에 상추의 실체는 알지라도, 영어 이름을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아울러, 학생들이 배우고자 하는 것은 내가 사고하는 방법이랑, 내가 연구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것만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역시 그들은 처음 내가 일을 시작한 시점부터, 6개월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 팀 리더인 "상추를 모르는" 나와 같이 일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 팀이 현재 랩에 있는 팀들 중에서 가장 promising 한 결과를 내고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  

 

물론 이제는 "상추"와 같은 용어까지 알아서, 영어로 농담 따먹기 하는 수준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인(?)이 되었다고 볼 수 없고,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깨닫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는 듯하다. 영어는 어디까지나 도구이고, 중요한 것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로서 Identity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실체는 영어보다 과학, 연구에서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이는 절대 영어만 잘 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참고하세요~ 채소와 그에 맞는 영어를 덧붙입니다. 모르는 채소도 많지만, 재미있기도 해요. 특히 가지는 영어로 계란식물 ^^)


따라서, 나는 영어를 native speaker 만큼 못해도, 비교적 당당한 편이다. 나는 영어로 교육받지 않았고, 한글로 교육받았다. 하지만, "그 교육의 실체는 알고 있다"는 입장을 항상 견지하기 때문에, 최소한 영어로 주눅 들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여전히 모든 것을 영어로 교육받고,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원어민 연구자들을 보면 부럽긴 하다. 

 

도구를 갈고 닦으면 더 멋지게 보일 수 있고, 영어가 좋으면, 내용물을 조금 더 좋게 포장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포장보다 내용물이 더 중요하다. 도구에 신경을 아예 안 쓴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너무 도구에만 신경 쓰면 영어만 잘하는 미국 노숙자(?) 신세[각주:4]가 될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미국에 있는 노숙자들은 "그들의 의사"를 완벽하게 영어로 표현한다. 하지만, 나는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노숙자"가 되기보다는 영어를 잘 못해도 내용물로 꽉 찬 "학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나는 한국인이다. 내 평생의 대부분을 한국어로 의사소통 해왔기 때문에, 영어를 미국인보다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한국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데 반해, 나는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하지 않는가? 당당해 지자.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영어에 대해서 조금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영어를 더 잘하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날카로운 글쓰기완벽한 발표 영어를 더 잘 하고 싶다. 더 노력하고 나를 갈고닦아야겠다. 결국 시간과 노력이 모든 것을, 아니 대부분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참고로, 한국 나이로 올해 5살 먹은 아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웬만한 채소 이름을 아는 걸로 보아, 대부분의 채소 이름은 초등 수준 이하의 단어임이 틀림없다. [본문으로]
  2. 만약 여기에 언급된 단어를 영어로 알고 있다면, 우연히 알게 되었거나, 경험으로 알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닌 이상, 교육으로는 접하기 힘든 단어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조금 더 수준을 높이면, 수학 공식(미분,편미분,방정식, 원주, 마름모, 평행사변형 등등)과 물리 용어(유체역학, 전자기 유도, 전자기장, 상대성이론 등등)이 있다. 영어로 이 분야를 학습하지 않는 한, 일반적인 영어 교육에서는 이런 영어 단어가 잘 등장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4. 노숙자를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직업성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을 지칭하는 맥락에서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본문으로]

연구는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고,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런 면에서 정부가 각계 연구자들을 위해서 사업 설명회를 진행하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우리 역시 정부가 어떤 복안을 가지고 R&D를 진행하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사업설명회에 참가해 보세요. ^^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서 시기를 달리해서 진행한다는 것 역시 환영할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




혹시 이 글을 처음으로 들어온다면 지난 포스팅을 참고해 보자. 

경제학은 어떻게 과학을 움직이는가?(1)

경제학은 어떻게 과학을 움직이는가?(2)

자 이제 대안에 대해 알아보자.  저자는 호기롭게 7가지 제안을 내놓는다.

1. 취업정보를 공유한다.

2. 연구비에서 교수급료로 지출되는 것을 제한한다.

- 미국의 경우 non-tenure 교수 연봉은 학교에 주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에서 직접 가져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한국은 따로 교수급료를 연구비에서 가져갈 수 없으니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3. 연구-훈련의 연결고리를 약화한다. 

- 인력양성소인 대학원과 연구를 위한 연구소 분리하자는 것이다. 물리학의 경우 페르미, CERN 등 유명한 연구소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GIST, DGIST 등등이 역으로 대학원, 학부기능까지 하거나, 하려하고 있다.

4. 대학원 지원금을 개편한다.

5. 연구자원센터 등 과학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정책을 만든다.

6. 공동연구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를 마련한다.

- 이것은 노벨상을 겨냥한 것인데, 3명까지만 공동수상자로 선정되는 웃기지도 않는 제한때문이다.)

7. 연구비 예산 사용처를 구체화한다.

보다시피 꽤나 현실적인 대안들이다. 몇가지 토를 달아보자. 

취업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우리나라 BK21사업이후 상당히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다. 당연하게도 BK21사업을 통해 대학원생들에게 인건비 지원을 한 정부가 그 대학원생들이 졸업하고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문제는 대학원생들의 취업이 졸업 직후에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도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사 졸업 후 바로 정규직 취업이 되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박사 후 연구원이라는 다소 불안정한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이후까지 구체적으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 몇년 동안 박사 후 과정을 거쳐 어느 대학, 또는 어느 연구소에 어떤 직급으로 취업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분야를 막론하고 이공계 석박사 통틀어 취업 조사해 통계 발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분야 별로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궁금하다면 KISTEP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라)  물리, 수학, 화학, 생물, 공학 등등의 계열 별로 말이다. 그래야 각 분야에 있는 학생, 대학원생들이 구체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며 과학도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원센터의 경우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개인적으로는 정부기관의 특성상 빠르게 기술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학 연구 중 글로벌 기술을 선도할 수 있는 high-end 급의 연구에 대한 자원을 적시에 적절히 지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연구와 실험을 하다보면 지금 당장 지원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항목을 미리 예상하여 신청하기는 힘든 경우가 많고, 그 지원이 연구와 발견 선점에 필수적인데, 그렇기 때문에 개별 연구자들은 정부기관을 통해 지원 받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다른 경로를 통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는 상당히 좋은 생각이며, (개인적으로 이용해본 경험은 없지만) 실제로 생물학자원센터가 있기도 하다.  각 대학의 연구기관이 모든 장비와 모든 형질전환 쥐를 관리할 수는 없고, 과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며 매번 구비하기도 어려우므로 국가 차원에서 이런 자원을 구비하고 관리하는 것은 필요할 것 같다. 

참고로 미국에서 포닥을 하고 있는 오지의 마법사 이야기를 빌리자면, 미국은 이런 코어 형태의 연구자원센터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깝게는 학교 내에서 구성될 수도 있지만, 최소한 각 주별로 특히 바이오 분야에서는 마우스 facility가 이런 형태로 운영되어서 효율적으로 연구 자원을 적시에 공급하고 별도의 비용을 청구한다. 그 비용은 결코 싸지 않지만 개별적으로 구성하는 것보다는 시간적으로 그리고 비용적으로도 비교 우위에 있기 때문에 자원센터 자체가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한다. 

연구비 예산 사용처를 구체화하는 것은 국가 단위에서는 필요할지도 모르지만,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이야기하자면, "개개 과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연구와 실험의 특성상 앞으로 예산 사용을 구체적으로 예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개괄적인 틀자체를 설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인건비를 제외한, 재료비, 설비비, 회의비 등등을 더욱 구체적으로 쪼개고 항목별로 구성하는 것은 연구 능력을 저하시킬 우려가 있다. 지금도 재료비, 설비비 등으로 나눠진 연구비를 1년 단위 결산할때 억지로 맞춰 쓰고, 맞지 않으면 용도 변경 신청을 하는데 생각보다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맞춰서 집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업체에 영수증 항목을 외상으로 이용하고 이월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드는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과학이라는 학문이, 또는 분야가 사회와 동떨어져 그들만의 객관적이고 우아하고 소위 과학적인 논리로 굴러가고 있지 않고, 도저히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필자의 서평은 성공이다. 

그런 관점에서 책에서 제시된 대안들, 그리고 필자가 단 투덜거림들의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국가' 또는 그에 버금가는 기관에 의해 주도되는, 또는 주도될 수 밖에 없는 대안이라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그 발전 양상을 보면, 그리고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이라는 것이 국가와 결부되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는 과학을 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파악하고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연구비 투자한다. 그렇기때문에 과학을 수행하는 주체가 표면적으로는 과학자들로 보이지만, 실상 깊이 들어가 보면 국가의 의지가 상당히 반영되기 때문에 실질적인 주체는 국가[각주:1]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약간 관점을 바꿔보자. 과학의 결실, 그리고 부산물의 영향을 받는 것은 우리 모두, 즉 시민들이고 그 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 대학원생들 역시 시민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당연한 생각을 바탕으로 과학의 주체를 시민으로 재설정해서 태어난 개념이 시민과학 또는 대안과학이다. 과학의 주체를 시민으로 놓고자 하는 개념 또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언뜻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개념이 생소하다면, '독립'이라는 접두어가 붙는 무언가를 생각해보라. 독립영화, 독립구단, 독립예술 등등. 국가나 자본에 귀속되지 않고, 수행하는 주체 또는 영향받는 사람들만을 오롯이 위한 무언가. 이제 감이 오는가? 과학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공학에서는 제 3세계를 위한 '적정기술'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천문학에서는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의 성과로 알려지기도 했고, 환경 보건 분야에서는 '시민단체'들의 보고서나 성과로 알려지기도 한다. 이들 모두 주류과학계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 주류 과학자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정치적인 영역이거나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주류과학 역시 완전히 순수한 지적 영역에 속할 수 없고, 국가 또는 연구비 지급 기관에 휘둘리기는 마찬가지라는 면에서 충분히 '정치'이다. 

과학은 '양날의 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고전적이고 닳고 닳아 빠진 그런 흔한 얘기로 덮어서는 안된다. 과학은 저 멀리 앞서 달려나가고, 그 결실을 정치가나 산업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된다는 진부한 얘기는 과학자들의 주체성을 몹시 훼손하는 것과 동시에 과학을 하는 행위의 정치성을 가려버리고 만다. 과학은 수행되는 순간, 아니 그 이전 단계부터 그 검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봐야한다.

그런 과학의 정치성을 인정하고 들어가면, 과학자가 취할 수 있는 입장과 층위는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험실에서 논문을 쓰고, 파이펫을 쥐고 실험을 하는 행위가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질질 끈 서평포스팅을 마친다. 


  1. 가만히 고등학교 시절 문과와 이과를 생각해보자. 국가의 의지를 수행하는 행정관의 대부분은 고등학교 시절 문과를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과학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을 것 같은 "문과"로 대변되는 행정관이 역설적으로 과학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은 어찌보면 아이러니다. [본문으로]

"표절"이라는 말이 있다. 남의 것을 그대로 베껴 쓴다는 것인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과연 여기에 대해서 적합한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우리 사회에는 남의 글을 제 것인양 포장하는 것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한 것 같다. 그리고 남의 글을 스크랩하거나 긁어가는 것에 대해서 일반인들도 그리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지만, 학문의 영역에서만큼은 남의 것을 그대로 베껴 쓰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아주 강하게 지탄받는다.

오늘 표절이라는 화두로 이야기를 꺼내었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긁어가기" 문화에 대해서 꼬집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블로그를 하다 보면, 내 글이 어딘가에 떡하니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한의사 커뮤니티에도 내 글이 있고, 의전원을 입학하고자 준비하는 커뮤니티에도 내 글이 있다. 그리고 유입 소스를 살펴보면, 그 쪽에서 유입된 것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난 그 커뮤니티의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글이 올라갔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여러가지 분석툴을 통해서 그 글이 어떤 글인가는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어떤 맥락인지, 그리고 왜 그 글을 긁어갔는지를 알 수 없다.

긁어가기는 기본적으로 아주 잘못된 현상이다. 아무리 출처를 반영한다고 해도, 원작자의 동의가 없으면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물론 긁어간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글을 소개하기 위해 혹은 정보를 보관하기 위해 라고 변명하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무조건 원문 모두를 다 긁어갈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 요약을 하고, 링크를 걸어두는 것으로 충분한데, 그런 요약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최소한 글을 쓴 사람들에게는 실례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특히나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Potential medical scientist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더 잘못되었다. 블로그의 글은 긁어 가도 괜찮고, 논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그런 이중 잣대로 자신에게 맞고, 편한대로 살아간다면, 도대체 누가 글을 쓰겠나? 또 그런 사람이 논문 조작을 안한다는 확신이 있겠는가?

사실, 문화라고 이름붙이기도 부끄럽지만, 이런 "긁어가기" 문화는 네이버나 다음 등의 포털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스크랩이라는 이름 하에 정보를 긁어가는 것인데, 이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을 수 있다. 가끔 링크만 긁어갈 경우 그 링크가 사라지기 때문에 스크랩을 통해 정보를 보관한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빈약한 블로그 유저들에게 자신들의 블로그를 풍성하게 보이게끔 하는 착시 도구일 뿐이다. 


첫째로 정보를 보관하는 용도라면 굳이 블로그 공개나 글을 오픈할 필요가 없다. 그냥 에버노트처럼 보관함만 만들면 될 뿐이다. 아울러, 따지고 보면 링크를 사라지게 하는 것 혹은 글을 삭제하는 것도 글을 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인데, 그 것에 대한 존중은 하나도 없다. 그저 긁어가는 사람의 편리함만을 생각할 뿐이다. 

둘째로 글을 쓰는 일은 정보를 생산하는 일이고, 정보를 생산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시간 노동은 일련의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공유하고, 그 정보에 대한 Authority를 가지겠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Authority가 없다면 장기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게 될 것이고, 아무도 좋은 정보를 생산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있는 글을 긁어가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이 블로그 인지도를 확장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이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블로그를 개인적으로 나눔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Ctrl+C/ Ctrl+V를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개인적으로 나눔을 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점차 이런 일들이 많아 진다면, 블로그를 폐쇄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블로그와 책은 아주 다른 매체이긴 하지만, 글을 쓴다는 시간 노동만을 본다면, 나에게 비슷한 일인 것이 사실이다. 블로그 글을 줄이고, 책이나 다른 Autority를 가질 수 있는 매체로 전환하는 것은 잠재적 독자들과 나에게도 더 유용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러고 싶지 않다. 정보를 제공한다는 가치를 보존하고 싶기 때문이다. 

최소한 원문 모두를 긁어 가는 것은 지양하자. 최소한 의학에 관심이 있고,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한다면, 그런 쓰레기같은 추악한 짓은 그만 두자. 요약이나 서두 발췌 정도만 하고 링크를 걸어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다. 긁어 가는 글들로 풍성해진 블로그나 커뮤니티는 결국 자신이 쓴 글은 없고, 알맹이처럼 보이는 허상만 있을 뿐이다.


과학자의 양심은 논문과 같은 거창한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글 복사 하나에도 나의 양심이 숨을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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